입춘(立春) : 봄에 들어가다
2026.2.4(수)
최저 기온 -8도 최고 기온 6도
미세먼지가 많지만 오랜만에 따뜻한 기운이 돈다
낭쉐와 입맞춤
새로운 해의 첫번째 절기는 입춘(立春)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진짜 봄도 아닌데다가 절기가 축으로 삼는 황경이 0도(이날을 춘분이라고 하더라)도 아닌데 입춘을 시작점으로 삼은 걸까. 음이 극에 달해 서서히 양의 기운이 돌아온다던 동지로부터 두 절기나 건너 뛰어, 왜 여기서 부터 시작하는 걸까.
아마 옛 사람들도 우리들과 같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얼어붙은 땅을 깨는 일과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서일게다. 딱딱하게 멈춘 강물의 아래에서 오래도록 물이 흘러야 완연한 봄을 맞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한낮의 여름과 앉을 새도 없는 가을을 버텨야 하는 분주한 농사일들을 시작하기 위해 미리미리 몸을 깨우고 소리쳐야만 한다는 것을. 시작을 위한 시작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새해에 빼곡히 적은 다짐들이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마는 우리들처럼 넘어질 시간까지 계산한 출발점이 필요했을 것이다.
제주에서는 신들도 잠시 쉰다. 지상에 내려와 인간사를 돌보던 1만 8천 신들이 한 해의 임무를 마치고 땅을 떠난다.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업무 보고를 올리고 근무평정을 받아 새로운 임지로 발령받는 기간이 바로 신구간이고, 그들이 돌아오는 날이 입춘이다. 알토란 같은 신들의 휴가 기간 혹은 신들의 재배치 구간은 슬프게도 가장 춥고 서러운 기간과도 겹친다. 매서운 찬기가 가시기도 전에 제주의 옛 사람들은 신들의 이직과 복직을 환영하고 더불어 새해의 농사를 기원하는 입춘굿을 성대히 치뤘다. 나무로 만든 소를 몰고오는 낭쉐몰이(낭은 나무, 쉐는 소를 의미하는 제주의 방언이다)를 하며, 겨울을 뚫고 봄으로 나온다. 이는 아직도 제주의 축제로 남아 있다. 낭쉐를 같이 떠밀고 큰 소리로 흥을 올리며 모두의 풍년을 기원한다.
입춘 때 목우를 만드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1999년을 전후로 하여 제주도입춘굿보존회에서는 입춘 때 목우를 만들어 제를 지내고 시청에서 관덕정까지 소몰이를 한다. 이때 시장을 비롯한 마을의 유지들이 참여하며, 제주도의 풍년을 기원한다. 목우는 매년 만드는데, 소의 생김새를 보고 그해의 날씨와 풍년을 점치기도 한다. 가령 소가 선한 모습이면 날씨가 좋고 풍년이 들 징조로 여기고, 소가 험한 모습이면 날씨가 춥고 농사가 좋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다.
_[네이버 지식백과] 목우희 [木牛戱] (한국세시풍속사전)
겨울에는 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에게 겨울은 말그대로 신이 떠났나 싶을 정도로 험한 구간이다. 입춘날이 되어서야 한달 정도 영하를 맴돌던 날씨가 너그러워졌다. 산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 덕분이다.
긴 추위에 아직은 강물도 단단히 얼었다. 하얀 강의 길 위에 그 위를 걸은 이들의 발걸음이 동그랗게 찍혔다. 종종 무늬가 찍힌 신발의 안쪽 발가락이 꽉하고 곱았을 것만 같다. 나라면 아마 무서워서 다섯 걸음도 떼지 못했을 것이다. 그 곁에 나처럼흰 풍경을 감상하는 어떤 엄마가 서 있다. 팔길이도 채 되지 않는 아이를 아기띠로 안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있는 한 여성의 밤을 떠올려본다. 엄마가 되어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어떤 여자들의 낮과 밤이 쉽게 상상된다는 것이다.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느끼지 못했을 인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길 위에 우연히 만난 다른 이들의 걸음과 내 보폭을 겹쳐 넣는다. 가깝고도 먼 상상들과 들쑥날쑥한 내 목소리들이 얼기설기 섞인다, 입춘이라는 말 때문일까. 마른 갈색의 땅들이 조용히 숨겨놓은 초록이 더 눈에 띈다. 그러고보니 헐벗은 나무들도 전보다는 더 촉촉하고 통통해보인다.
아슬히 고개 내민 내게 첫 봄인사를 건네줘요
피울 수 있게 도와줘요
이 마음 저무는 날까지 푸른 낭만을 선물할게
초라한 나를 꺾어가요
아슬히 고개 내민 내게 첫 봄인사를 건네줘요
피울 수 있게 도와줘요
아슬히 고개 내민 내게 첫 봄인사를 건네줘요
피울 수 있게 도와줘요
이 마음 저무는 날까지 푸른 낭만을 선물할게
초라한 나를 꺾어가요
_한로로 <입춘>
한로로의 데뷔곡 '입춘'의 처음은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얼어붙은 마음에 누가 입 맞춰줄까요" 아슬아슬한 목소리는 여린 싹처럼 인사를 구하고 먼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바람은 사랑과도 닮았고 시작과도 닮았다. 산책길에서 나는 이 노래를 여러번 들었다.
한해의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낭쉐는 단단한 희망이 있다. 아슬히 틔우려는 사랑에서 용기를 읽는다. 그러나 그 속에도 주저함이 있다. 언 땅의 틈으로 피어나는 여린 싹들을 더욱 응원하게 되는 건, 하찮을 정도로 약하고 두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는 마음은 너무도 연약하다. 내일은 흐려 잘 보이지 않고 초라한 내 마음은 곧잘 분주하다. 우리는 흔들리며 봄의 앞에 선다. 그러나 찬기가 가시지 않은 세계 속에서 같은 기도를 올리고 인사를 나눌 수 있다면, 섞여가는 마음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을까.
아이들 장난감 바구니에서 나무소를 꺼내어왔다. 이만큼 선하게 생긴 소도 없을 것이다. 겨울을 밀어내는 봄의 소다. 오늘 만큼은 한 겨울에서 봄을 말하는 낭쉐다. 빙긋 웃는 하얀 젖소를 산책길 위 드문드문한 초록 사이에 둔다. 딱딱한 것들을 뚫고 시린 것들을 견뎌내는 연약한 것들에게 따사로운 계절과 풍년을 바라본다. 당신의 얼은 마음에 입맞춰줄 누군가가 항상 있기를, 봄의 첫 인사를 건낼 수 있기를.
[네이버 지식백과] 목우희 [木牛戱] (한국세시풍속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11007&cid=50221&categoryId=50230
[제주의소리] “액은 가고 복은 와라” 동장군 시샘하는 봄 ‘탐라국입춘굿’
https://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443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