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立春) 산책과 넉넉한 에피소드

by 봉진

2026년 2월 4일(수)

최저온도 -3°/ 최고온도 10°


겨울의 틈새를 비집고 스며드는 입춘(立春).

바람은 차갑지만 햇살 끝에는 온기가 따스해 우리는 긴 산책을 나섰다.

산책길에 종종 마주치던 이웃분이 옆마을 산책로도 가보라며 권해주신 적이 있는데 오늘 같은 날이면 긴 산책을 나서도 되겠다 싶어서 낯선 산책길을 가보기로 했다.

우리 마을보다 가구수도 많고 면적도 큰 마을인데, 마을로 깊숙이 들어 갈수록 논밭 규모도 우리 마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 보였다.

산자락을 끼고 있어서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논, 밭이 보이고 층층이 들어선 집들도 있었다.

오르막에 지어진 덕분에 햇볕을 못 받는 집이 없었다. 한창 오르막을 오르다 보니 마을분 세분이 저 앞에서 우리가 누군가 하고 보고 계셨다. 서계신 곳에 다다르니 우리가 누군지 궁금해서 기다리고 계셨다면서 어느 마을에 사는지 곡성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물어보셨다. 그중 한 분이 자기만 아는 산책길을 알려주시겠다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안내가 시작됐다. 자기만의 산책로인 숲길로 들어섰는데, 본인은 잘 포장된 길이 아닌 이길로 다닌다고 하시며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지 감탄하면서 앞장서셨다.

곡성에 오신 지 10년이 되셨다는 새로 만난 이웃분이 가시는 그 길을 가만히 따라가 보니 원래 없던 길을 10년을 다니시며 만드신 길 같았다. 등산로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 길을 따라가면 자기 집이 나온다고 하셨는데 집에서 마을 입구까지 나가는 지름길을 세월로 만드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낙엽으로 뒤덮인 길에 키가 큰 소나무 길을 지나고 무덤이 나왔는데 앞장선 그분은 그 무덤 옆에 아무런 길도 보이지 않는데 아무렇지 않게 휙 지나가시는 걸 보면서 '아 여긴 정말 저분이 만든 길이구나' 확신했다.


꼬불꼬불 숲길을 지나니 집들이 보였다. 본인집을 가리키시며 시원한 물 한잔 마시고 가라고 권해주셨다.

귀찮게 해 드리는 건 아닌가 싶어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본인 집에서 보이는 풍경과 10년을 가꾼 마당 정원도 보여주고 싶으신 것 같아 두 번 사양 안 하고 따라갔다.

집 마당에 들어서니 자랑할만한 풍경이었다. 밖에 마련해 둔 퇴청 마루에 앉아서 보니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 보이는 산세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봄이 되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지 궁금하고 집주인이 자랑할만해 보였다.

오래 숙성한 매실청은 약이라며 매실음료를 대접해 주셨다. 지난 10년 동안 어떻게 마당과 정원을 가꾸었는지, 직접 지은 온실과 오래된 창호문으로 만든 닭이 사는 집도 보여주시면서 겨울이 지나면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지 벌써 설레는 얼굴로 말씀을 이어가셨다. 본인이 그렇게 했듯 천천히 가꾸면 된다고 젊은 나이게 일찍 시골생활을 선택한 우리를 위한 응원도 빼놓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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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마당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도 귀한 경험이었는데, 응원의 말씀과 베푸는 마음에 감사하다는 말은 턱없이 부족했다. 찐하고 풍족한 따스한 마음을 얻어 마을을 천천히 내려갔다.

입춘을 맞아 산책이나 갈까 했던 시작이 우연히 마주친 이웃의 뜻밖의 환대로 우리의 '입춘대길' 완성되었다. 입춘에 받은 이 기분 좋은 대접 덕분에 올 한 해는 왠지 넉넉한 일들로 가득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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