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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더 피트> 후기

by 시우

요즘 자소서에 유행하는 레퍼토리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때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나태해졌을 때 밤 11시의 대학병원 응급실로 찾아가는 클리쉐가 있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실려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이는 환자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절규하는 보호자들, 그리고 응급실에서 치열하게 힘을 쓰는 의료진들을 보면서,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라는 소포클레스의 명언을 몸소 느끼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일단 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듣기에는 그럴듯하면서도 몇 가지 의문도 들었었다. 첫째, 대학병원 정도의 응급실에 아무 때나 가도 그렇게 사건 사고가 많을까? 둘째, 그런 갖가지 사고들을 보면서 내 인생은 소중한 것이라는 느낌이 정말 들까? 행동력으로 이어질 만큼의 호기심이 드는 정도는 아니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응급실의 긴박함을 생생하게 경험해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보았으니 HBO 오리지널 시리즈 <더 피트>다.


<더 피트>는 피츠버그 외상 센터 응급실(PITT)의 주간조 근무자의 근무시간을 리얼타임으로 다루는 드라마이다. 시즌1의 경우 총 15화로 해당 일의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의 드라마 내의 15시간을 다룬다. 자소서에 응급실 클리쉐를 진정성 있게 담으려면 PITT에 나오는 정도의 응급실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PITT는 너무너무 긴장감이 있다. 하루 전체도 아니고 15시간인데 이렇게나 많은 일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환자들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데, 실제가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내 건강한 삶이 감사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 현장의 모습들이 척박한 사회의 끝에 몰리고 몰려 터져 나오는 듯했다.


드라마는 아무래도 의료진 위주의 시선을 주로 다룬다. 많은 사람들을 기적처럼 살렸어도 몇 명의 환자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 수많은 케이스를 보며 나의 성장 기회로 보는 사람, 환자와 보호자가 처한 상황에 꽤 많은 이입을 하는 사람 등 입체적이고 다양한 사람들을 보여주어서 인상 깊었다. 정말 정신없는 와중에 서로 괜찮냐며 챙기고, 치프(Chief)가 모든 진단과 치료, 수술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레지던트나 인턴들이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자기 주도권을 주고 자신들은 감독 관리를 하는 조직문화도 꽤 인상 깊었다. 의사로서 하루하루가 너무 고되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어도 응급실에 남아있을 수밖에 만드는 그 묘한 무언가도 느껴지기도 했다. 어릴 적 같았으면 피가 끓고 식어가는 열정을 다시 불타고 했겠지만, 삶의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었나, 그 깊이를 더 해가는 질문들이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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