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흑산도 아가씨

먼 길 돌아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오다 - 조금 긴 이야기

by 쉐비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온몸이 힘들고 괴로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한참을 자다가 문득 눈을 떴다. 화장실을 가야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중간에 일어나는 일 없이 아침까지 잠 좀 편하게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이렇게 하릴없이 일어나야 했다. 괴롭다. 머리맡의 시계를 들여다보니 시침은 이제 겨우 새벽 두 시에 다가서고 있었다. 아이고메, 이 시간에 벌써 잠을 깨면 어떡하나. 항상 신경을 쓰면서도 그냥 마시고 또 마셔버리는 그놈의 커피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보다는 어제 하루 종일 분주하고 복잡했던 일들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더 컸다.


지난 월요일부터 5일간 주민동의를 받는 전자투표를 했다. 입주자대표회의가 현재의 관리주체와 재계약을 하고자 하는데 입주민들이 이에 동의하는지를 묻는 절차였다. 계약만료 두 달을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내가 소속한 주택관리업체의 진퇴와 관련된 문제여서 어느 때보다 신경을 써야 했다. 과반수 동의가 필요했다. 어쩌면 소장인 나에 대한 신임투표 성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결코 버릴 수가 없었다. 주택관리를 잘하냐, 못하냐는 절대적으로 관리사무소장의 역량과 수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재계약 문제가 현안으로 부각된 이후부터 일말의 불안한 기분이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최근 몇몇 동대표들의 움직임을 직간접적으로 감지한 본사 관계자도 안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반응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소장님,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세요."

돌아보면, 단지에 와서 일한 지난날들은 지금껏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또한 특별했다. 입주민들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은 별로 없다. 무례하고 거친 언사로 무척 속상하게 했던 한두 명 젊은 동대표들의 얼굴만이 이제는 흘러간 시간의 잔재로 남았다.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는 척했다. 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 추측은 가지만 - 불만이 쌓이면 그야말로 광란의 말폭탄을 퍼붓곤 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갖가지 꼬투리를 잡으며 폐부를 파고들기 일쑤였다. 무시하고 경멸하며 모멸감마저 느끼게 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가하는 강력한 압박이자 무언의 메시지임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당신, 이래도 안 나가고 버틸래?' 내키지는 않지만, 나는 불가피 심리전을 계속 이어가야 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찌 어른에게 저토록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걸까'. 어느 집 개가 짖고 있냐는 듯 가끔씩 고개를 들고 건조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멀뚱멀뚱 나의 처연한 눈초리를 일부러 그에게 돌려주었다. 쉽사리 그에 반응하며 맞서고 폭발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속으로 허허 쓴웃음 한번 짓고 넘어가면 될 일이라고 단정해버렸다. 단순히 그놈보다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얕은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의 어쭙잖은 노림수에 걸려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화가 아쉬웠다. 나름 섭섭하거나 불만스러운 일이 있으면 솔직히 털어놓으면 좋았을 것이다. 일부러 강한 척, 센 척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눈치만 살필 뿐 차마 나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슨 몹쓸 병이 도지기라도 하는 듯 눈앞에서 그런 상황이 전개될 때면 나는 그저 담담하게 들으며 지켜만 볼 뿐 속에서 치솟는 분을 누르고 또한 삭여야 했다. 차라리 바보가 된 것처럼 전혀 응수도, 대꾸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갑 앞에서 을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갈래길의 말로는 너무나 뻔한 것이니까. 반면 그런 상황에서 느꼈던 자괴감은 너무나 컸다. 속이 시커멓게 타고 내상도 컸다.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당장에 손 털고 일어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순간의 감정에 휘말려 집어 치고 떠난다면, 그게 오히려 비겁하고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차라리 그의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버티고, 참고, 견디며 가던 길을 묵묵히 가기로 하였다. 어차피 그에게는 정해진 시간이 있지 않은가. 그 시간 밖으로 밀어내주리라.


모든 문제는 위탁관리를 마치 자치관리처럼 오인하고 행동하는 그들의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젊은 사람들이 오히려 구닥다리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모습을 보고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의 신경전 끝에 얼마 전, 그들은 임기만료로 물러났다. 비록 그렇게 무대에서 사라지더라도 재선 된 몇몇 후임 대표들에게 은연중 행사할지도 모르는 알량한 영향력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재계약 절차는 마치 돌다리 두드리며 가듯 이러한 스토리를 배경으로 입주자대표회의를 거쳐 한 발짝씩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행히 전자투표는 무난히 잘 끝났다. 그간 걱정했던 일들이 기우였던 것일까. 대표들보다 주민들이 더 현명했다고 해야 하나. 예상을 뛰어넘는 높은 투표율과 동의율이 나왔다. 재계약, 재신임 투표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던 여러 입주민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한동안 체했던 속이 한 방에 시원하게 풀리는 듯 후련하였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우연히 불러본 이미자 씨의 노래 '흑산도 아가씨'가 너무도 마음에 와닿았다. 마치 지난날 내가 겪었던 그 인고의 시간을 비유한 것만 같아 잔잔한 위안을 느낄 수 있었다. 일이 힘들어 자포자기로 펜을 꺾고서는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보기로 했던 지난 날이었다. 그리고 스무 달이 흘렀다. 난데없이 꼭두새벽에 벌떡 일어나서도 다시 잠이 오지 않았던 데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세수를 하고 거울 속의 나를 쳐다보았다. 조용히 골방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무작정 묻어뒀던 시간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다시,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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