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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Oct 08. 2022

비망록

백 선생과 아더스(others)

   일을 하다 보면, 어쩐지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그가 누구든 주민이 하는 말이라면 귀를 기울이고 가급적 수용하고자 노력하는 편이지만, 좀처럼 그게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마음 한편이 불편하여 찝찝한 기분이 남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민원을 제기하고 거머리처럼 매달리는 사람이 특히 그렇다. 1층 대형 평수에 사는 백 선생이 그랬다. 나는 그를 마음속에 PNG(Persona Non Grata, 기피인물) 중 한 사람으로 분류해두었다. 그는 아파트 단지 입구의 상가 이 너무 지저분하여 첫인상을 흐리니 그곳을 깔끔하게 보수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진입로변 경계석에 때가 시커멓게 끼어있어서 아주 보기 흉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런 이유로 집값이 안 오른다는 것이었다. 집값에 불만이 많은 눈치였다. 전임 소장에게도 누차 얘기했던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하루 이틀 된 민원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전임자가 왜 그렇게 시간을 끌었을까 궁금하여 혼자 배회하듯 유심히 현장을 살펴본 일도 있다. 아파트 단지와 상가의 경계가 있는 부분이어서 소요비용을 쌍방 간에 과연 어떻게 분담해야 할 것인지 고민스러웠을 것 같았다. 계정과목을 단순한 수선비로 할 것인지 아니면 장기수선충당금을 사용해야 할 것인지도 잘 판단해야 할 문제였다. 아무리 입찰이 사업자 선정의 만능 도구라 하지만, 공사 내용이나 물량으로 보아 입찰에 부치더라도 시간 낭비만 될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일이 자질구레하고 잡다해서 입찰에 응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봤다. 동료 관리소장의 소개를 받아 보수업체 사장님 두 분을 각각 따로 초치해 의견을 들어보기도 하였다. 그런 건 잡부를 사서 하면 될 일이라는 말을 하고서는 싱겁다는 듯 그냥 돌아가버렸다. 우리 식구 기전과장의 견해도 들어보고, 과거 서류도 찾아봤다. 뜻밖에도 입찰에 부친 기록이 있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뭘 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현재 모습이 그 당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걸 한눈에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하여튼 진입로의 말끔하지 못한 인상 때문에 집값이 오르지 않는다는 백 선생의 주장은 참 별스러웠그런 만큼 잘 잊히지도 았다. 집값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첫째도, 둘째도 입지(立地)라는 건 상식이다. 그냥 하찮은 이유라도 될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유독 진입로 경계석에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 그의 저의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것은 마치 군대 시절 하나마나한 일을 가지고 졸병을 괴롭히는 못된 고참 심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어 내심 불만스러웠다. 대개는 소장이 상당 기간 동안 미적거리면 그럴 만한 어떤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넘어가 주는 게 보통이련만, 이 분의 경우는 전혀 그런게 아니어서 난감하였다.




   백 선생은 항상 깔끔한 외모에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말도 낮은 목소리로 점잖게 하는 편이었다. 나는 그가 보기 드문 신사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나름 호감을 가졌었다. 그런데 웬걸 접할수록 대화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가급적 피하고 싶어졌다. 그가 제기한 민원은 먹자니 먹을 게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갈비 같은 격이었다. 선뜻 들어주기도 그렇고 아예 무시하기도 그런 것이어서 한동안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었다. 기껏 피하려고 하면, 지나치다가도 우연히 더 잘 맞닥뜨리는 불운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멈칫하고서는 그의 추궁하는 언사를 꼼짝없이 들어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루는 점검차 단지를 한 바퀴 둘러보던 중이었는데 집에서 창밖으로 지나가는 나를 발견하고서는 얼른 내다보며 불러 세웠다. 그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또 물었다.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물론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얼버무리고 넘어갔지만, 그럴 때마다 씁쓸할 뒷맛이 남았다. 그 후부터는 나는 마치 어린아이 처럼 그 집 앞쪽으로는 가급적 지나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다른 기회에 다시 마주쳤을 때 과거에 혹시 어떤 일에 종사하였는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 일이 있었다. 건설회사에 다녔고, 벌써 퇴직한 지 꽤 됐다고 했다. '아, 그래서 일가견이 있다는 듯 뭐가 그리 어렵냐며 끈질기게 주문하는 것이었구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으스대던 그의 표정을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전에 살던 곳에서 동대표 회장도 했노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보태기도 하였다. 그 말은 곧 다음번 동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도 있다는 제스처로 느껴졌다. 전임 소장이 업무 인계인수를 마치고 떠나던 날, 평소 이 단지에서 조심해야 할 인물들이라며 간단한 비망록을 하나 나에게 전해준 일이 있었다. 이간질을 일삼는다거나, 뒤통수를 잘 치는 사람, 시도 때도 없이 고질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 하는 일 없이 관리사무소에 자주 나타나 염탐하거나 감시하는 사람 등등 재임기간 중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라고 귀띔해주었다. 불현듯 그 비망록이 생각나 다시 떠들러 봤다. 아닌 게 아니라 백 선생 이름도 거기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비시시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보면, 관리사무소에 얼굴을 자주 내미는 사람들은 대개가 비망록에 거론된 인사들과 거의 일치하였다. 노인회 김 회장님이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역시 사업체를 경영하다가 은퇴하기까지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사 늘어놓기를 좋아하였다. 지금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제이씨(JC) 클럽활동 얘기는 빠지지 않는 고정 메뉴로 등장한다. 올 때마다 듣다 보면, 몇 가지 반복되는 레퍼토리로 신선미가 떨어지는 걸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유난히 그분과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렇게도 잠이 와 졸렸다. 얘기가 도무지 재미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나이 80세가 멀지 않은 그분이 관리사무소에 나오는 것은 말동무를 찾아오는 면도 있지만, 은근히 여러 동향을 살피는 눈치도 없지는 않았다.




   비슷한 나이의 박 이사도 심심치 않게 찾아와서 실컷 대화를 나누고 가는 단골손님이다. 그분이 올 때는 항상 뭔가 의도나 목적이 드러나 보인다. 어떤 직원의 태도를 지적하거나 이미 의결한 안건의 결론을 못마땅해하며 뒤늦은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것이 본론이 아니라 서론에 불과한 메뉴들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나고 만다. 평소 주변에 말이 통하는 동년배 친구가 별로 없어서 외롭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나는 어르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맞장구도 치며 열심히 따라가다 보면,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가시고 나면,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와 하던 일을 서두르기 바쁘다. 급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야멸차게 끊지 못하는 나의 성격 탓이 다. 확실히 고령층이 많아졌고 활동 욕구가 여전한 어르신들이 많다는 걸 실감한다. 그런 시대조류에 맞게 주민들을 잘 대할 줄 아는 능력과 수완은 고령사회의 관리소장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질이 아닐까 싶다.




   소장에게 한가할 틈이 별로 없지만, 개별적으로 얘기를 나누고자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예정에 없는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려고 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전임 소장에게 기피인물로 꼽혔던 인사들 중 지금 내가 여전히 PNG표시를 남겨놓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언제나 내가 1급 심리상담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분들과 대화를 통하여 인품을 파악하고 충분히 포용할 만하다고 판단한 결과다. 이제는 그분들도 오히려 내가 단지의 현안과 기타 관심사에 관한 여론이나 의견을 듣고자 할 때에 창구가 되어주는 여론주도층(opinion leaders)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미 나에게 귀하고 소중한 자산으로 변신해 있는 것이다.^^ 상대방은 나의 태도와 사고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신념의 결과다. 거기에 같이 어울려 사는 삶의 묘미와 경이로움이 숨어있다는 것을 여전히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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