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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Aug 25. 2022

능력과 수완 사이

세상 사는 법도, 생각도 가지가지

   종종 틈날 때 아파트 관리용품 카탈로그(Catalog)를 펼쳐보면 흥미롭다. 보긴 봤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거나 전혀 모르는 장비나 연장들이 있다. 보수를 해야 하는데 마땅한 자재로 뭐가 있을까 궁금할 때도 자주 있다. 그럴 때마다 카탈로그를 꺼내어 뒤져보면, 어딘가에 반드시 사진과 이름이 '짠~!'하고 나와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반갑고 즐거운 쾌감은 마치 사전 속 영어단어를 찾는 기분과 흡사하다. 만물상처럼 온갖 아파트 관리용품을 한 데 모아놓은 선전용 칼라 책을 여기저기 넘기다 보면, 복잡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식혀지기도 한다. 자재를 취급하는 몇몇 자재상들이 저마다 개성 있게 제작하여 무료로 배포하는 상품정보집다. 가진 것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몽땅 담아놓은 모양이 마치 그림 전시장에서 보았던 도록(圖錄)을 연상케도 하다. 관리업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나에게는 그 전에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그림책이다.




   관리업무를 효율적으로 집행하자면, 평소 보수용 자재나 물품의 적정 재고량을 유지하고, 수요가 발생하면 적기에 조달하는 관리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자면 실물 현황과 장부가 일치되도록 일상점검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의 중요성이나 시급성 등에 밀려 재고관리는 하찮은 일로 취급되며 사각지대로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뭐랄까. 당장 필요해 돈을 주고 사는 일은 빠르게 서두르지만, 사후관리는 나 몰라라 하고 내팽개쳐지는 경우가 많다. 재고가 있어도 확인도 하지 않고 구매부터 하거나, 어딘가 있음에도 찾지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직원이 자주 바뀌면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다. 재고관리는 관리소장이 챙겨야 할 사안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과장이나 담당 직원에게 일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심심찮게 허점이 노출되고, 은연중 부패한 사고방식이 작용할 소지도 없지 않다. 소장이 장부를 붙들고 관리현황을 가장 정확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때는 따로 있다. 퇴사를 하는 경우 인수인계서를 작성하는 시간이다. 결과적으로 어떻게든 장부와 맞추긴 하지만, 한바탕의 작은 소동은 관행처럼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가 된다.




   작년 대단지에 근무할 당시, 오 대리는 다른 직원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오래 근무한 자칭 기전직 고참이었다. 관리사무소에서 기전직이라 하면 특별히 요구되는 전문자격증이 없는 일반직군을 말한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지만, 기계나 시설분야에 약간의 경험이 있다면 입질이 더 있는 편이다. 경비나, 미화 업무는 주로 외부 전문업체에 용역을 주지만, 전기나 기계설비, 그리고 조경을 포함한 시설관리 등은 관리사무소 직원이 담당해야 하는 고유 업무다. 기술이 없는 초짜라도 진입이 가능한 분야지만, 실제로는 경험과 경력이 없거나 짧으면 취업의 관문을 뚫기가 만만치 않다. 입사하면, 군대처럼 사수에게 지도받으며 기술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 그렇게 차근차근 경력을 쌓으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면 다. 경우는 다양하고 제각각이며 천차만별이다. 경력에 따라 주임, 반장, 대리 등의 타이틀을 붙이는 기전 직원이 담당하는 일은 과장을 보조하는 역할이다. 전기과장 혹은 기전과장, 관리과장, 또는 기계설비과장 등 규모에 따라 각 전문분야가 있는 과장직은 관련 법률이 요구하는 전문기술자격증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꿰차고 앉는 자리다. 전기, 소방, 기계 등은 각각 안전관리자 선임이 필수인데 소정의 자격을 갖춘 과장이 맡는 게 보통이다. 이때 보조 선임이 필요한 경우 주로 기전 직원이 그 자리를 메꾸는 식이다. 오 대리도 그랬다. 그는 단지 근무경력이 다른 사람보다 긴 만큼 시설의 배치나 구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 단지는 모든 자재가 한 군데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떤 자재가 어디에 있는 지도 정통하였다. 그런 그가 한참 월동준비를 하던 시기에 뭐가 좀 섭섭했던 지 난데없는 꼴통을 부려 속을 상하게 하였다.




   수목 중 특히 추위에 약한 배롱나무에 보온재를 입혀야 하는데, 재고가 없다는 것이었다. 구매하면 될 것을 그렇게 고민하냐고 했더니, 시내 가게 여러 곳을 알아봤으나 벌써 성수기라서 죄다 물품이 동이 나 도저히 구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상당 기간을 기다려야만 한다고 하였다. 어쩐지 태도가 배째라식 같았다.  사이에 배롱나무가 다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스러운 말까지 늘어놓았다. 그 모습은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나를 은근히 골탕 먹이며 시험하속셈처럼 보였다. 창고에 재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무지 그런 사정은 내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였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관리사무소에 불만이 많은 일부 주민들이 이런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만약 나무가 얼어 죽는 날에는 소장에게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라며 한술 더 뜨고 나섰다. 확실치는 않지만, 나에게는 그들이 합작으로 협공하며 협박하는 모양새로 보이기도 하였다. 직원과 내통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때 그 보온재를 뭐라고 부르는지 그 이름을 몰랐다. 그냥 '그거'라고 얼버무리며 오 대리에게 빨리 찾아보라고 다그치기만 하였다. 밤이 되면 실제 바깥 기온이 급강하하는 날도 있었다. 오 대리 말처럼 하루라도 빨리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주변의 친한 동료 소장에게 전화를 하고 나무를 감싸는 보온재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다. 그도 가물가물하다면서 한참 있다가 '녹화 마대'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배롱나무는 그 정도 추위에 얼어 죽지 않는다며 천천히 해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휴~, 그렇군요!" 다행히 물건이 생각보다 일찍 가게에 들어와서 오래 기다리지 않고 녹화 마대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기전 직원을 총동원하여 배롱나무 보온작업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관리사무소에 출근하듯 드나들며 집적거리고 시비를 걸던 70대의 한 징글머니가 언젠가 나와 승강이를 벌이던 일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그때 XX철물점은 왜 거래를 끊은 거냐고 윽박지르듯 나에게 물었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참았었다. 알고 보니, 이번에 오 대리가 녹화 마대를 산 곳이 바로 그 집이었다. 한동안 그가 자재를 구매하는 주거래처로 삼았으나, 작년 초 과장이 바뀐 이후 거래가 뜸해졌던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조차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결탁했던 거야?' 쓴웃음이 나왔다.

'녹화 마대'를 비롯한 관리용품들이 실린 카다로그




   오 대리와 관계가 좋았던 최 과장이 그해 여름이 끝나갈 즈음 퇴사를 하였다. 사직서를 내기 전, 그는 상당량의 자재를 구매해야 한다며 기안을 올린 일이 있었다. 다분히 의도가 담겨 있는 듯하였지만, 나는 약간 뜸을 들이기만 하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디에 쓸 것인지 물으니 당장 보수하거나 교체해야 하는 물량과 재고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대답을 하였다. 거래처에 관하여는 그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리라 믿고 나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때는 사실 내가 아는 거래처도 없었지만, 어디서 누구를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한 번은 오 대리가 내 자리로 찾아와서는 최 과장이 가까운 곳 놔두고 꼭 먼 곳에 있는 가게와 거래를 한다며 불편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밀고에 가까운 그의 지적이 일응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거래처를 두고 서로 땅따먹기 하듯 다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되레 의구심이 들었다. 알고 보니 최 과장은 처음부터 그렇게 고정 거래처를 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매를 해왔다. 거기가 아마도 다른 곳에 근무할 때도 이용한 오래된 거래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관리사무소 경력은 나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많았다. 그동안 산전수전 겪으며 갈고닦은 수완을 특히 거래선과 관련하여 십분 발휘할 수도 있겠다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기술 문제에 어두운 내가 다짜고짜 내역을 따지며 파고들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시절이었다. 그저 서류상으로'꼼꼼하게' 체크하며 절약하라고 당부를 해둘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미심쩍은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고정 거래선이라는 것이 필요시 물건을 신속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뒤집어보면 단점도 많기 때문이다. 최 과장은 내가 이제 막 관리업무에 뛰어들어 아직 뭘 모르고 어리버리한 틈을 십분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나는 사회경력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피차간의 두드러진 경력 차이로 인하여 나는 리더십 발휘에 약간의 애로를 겪어야만 했다.




   한편, 오 대리는 김 반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카센터와 승강기 회사 기술 경력이 있는 김 반장은 오 대리가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둘 사이에 육두문자를 써가며 다퉜다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기도 하였다. 결국 그 문제로 내가 그들을 불러서 잡음을 만들지 말라고 타이르며 서로 화해를 시킨 일도 있었지만, 여전히 불편한 관계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김 반장은 오 대리가 자기보다 먼저 들어온 고참이기는 하지만, 공사판 십장처럼 큰소리만 칠 뿐, 기술이 별로 없다며 투덜거렸다. 반면, 오 대리는 김 반장이 단지 내 세대에서 친구인 업자가 하는 보수공사를 도와주며 따로 돈을 벌고 있다고 불만이었다. 형평에 맞지 않다며 김 반장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고 하였다. 일근직인 오 대리는 매일 출근하여 근무해야 하지만, 감단직 격일제로 일하는 김 반장은 쉬는 날에 나와서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지적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도덕적 해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문제였다. 설령 쉬는 날 나와서 일하는 것이라지만, 엄밀하게 보면 이해충돌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것도 경험이 짧은 탓일까. 가만 보니 각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든 돈을 더 벌 수 있는 구석이 없는지 찾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이런~!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각자 사는 방법과 생각의 차이는 이토록 크고 다양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면을 알면 알수록 세상은 요지경이다. 어느 게 수완이고, 어느 것이 능력일까. 각자는 자기만의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지키며 산다.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밥벌이 하느라 조심조심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들이다. 기왕에 프로를 지향하는 내가 참고하고 타산지석이 아니라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점들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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