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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Aug 13. 2022

발칙한 상상, "관리소장 사망 사건"

우문현답이라는 자극제

   해가 갈수록 날씨가 점점 더 사나워지는 느낌이다. 기후변화 영향이라고 말하는 식자들의 작은 목소리가 그만큼 빈번하고 커지며 부쩍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 모으는 것 같다. 폭염 수준의 무더위는 매년 그 날수가 길어지고 있다는 예보다. 1년 중 가장 더운 때라고 널리 알려진 7월 말과 8월 초는 직장인 등의 휴가가 집중되며 휴가시즌이 절정에 달한다고 한다. 방송에서는 이때를 특정하여 '7말 8초'라고 부르기도 해 인상적이었다. 정년퇴직한 나는 사람들이 몰리는 시기를 가급적 피하는 편이다. 기왕의 시간을 여유 있고 호젓하게 즐길 수 있기도 하지만, 이제 그렇게 남들과 똑같이 움직여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생각은 또한 젊은 사람들에게 배려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7월의 마지막 주와 8월 첫 주에는 비가 오지 않고 해가 쨍쨍 내리쬤다. 바쁜 직장인과 가족들이 휴가를 만끽할 수 있게 하늘이 보장해준  같았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주, 남부지방은 여전히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데 수도권을 비롯한 중부지방에는 예상 밖의 많은 비가 내렸다. 호우경보를 발령하는 기준이 하루 150mm 이상이라는데 서울 등 수도권에는 그 두배 수준인 300mm 이상의 폭우쏟아져내렸다고 한다. 115년 만의 기록적 집중 호우란다. 작년, 재작년에도 침수됐던 서울 강남지역 일대가 또다시 물바다를 이루며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두려워하는 인간의 무기력한 한계를 TV 뉴스 화면을 통하여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큰 비가 내려 평소보다 일찍 서둘러 출근을 하였다. 아뿔싸, 관리사무소 문이 잠겨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간밤에 당직을 선  과장이 아마도 민원전화를 받고 어딘가에 출동하느라 문을 잠그고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방과 도시락을 복도 한쪽에 내려놓은 다음, 먼저 아파트 단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경비초소에 들러 반장님을 대동하고서 함께 점검을 시작하였다. 각동 현관 게시판에 공고문이 제대로 게시 있는지, 날짜 지난 건 없는지부터 살펴보았다. 장마기에 특별 관리와 주의가 필요한 수구와 배수로도 구석구석 들여다보았다. 반장님은 어제 근무자가 배수로 주변에 쓰레기를 모아만 놓고 치우지 않았다며 고자질하듯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알 만하신 분이 왜 그랬을까요? 자기가 한 일은 반드시 끝마무리까지 잘해주셔야 합니다." 순찰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만보기를 들여다봤더니 채 3,000 보도 못 걸었다. 일을 운동삼아 열심히 돌아다니자는 생각이지만, 요즘처럼 무더운 계절에는 매일 만 보 걷기가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여느 때와 같이 오늘 아침에도 단지의 제반 시설을 점검, 기록한 각종 일지에 일일이 사인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경비 일지, 근무일지, 전기안전점검일지, 방화관리일지, 승강기 점검 및 관리일지, 수배전 운전 기록부, 기계실 작업일지까지 7가지다. 모두가 아파트 단지의 안전관리계획과 소방계획에 따라 매일 실시하는 점검활동이다. 그 밖에도 2주마다 점검하는 발전기 운전일지가 있고, 매월 1회씩 정기적으로 점검, 작성하는 어린이 놀이시설 점검일지와 저수조 점검일지도 있다. 흔히 말하는 우문현답은 관리업무에도 역시 딱 맞는 모토다. 현장에 가서 직접 점검하고 확인하는 일은 매일 되풀이하는 루틴(routine)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경비원, 기전직원 등 각 담당이 작성하는 제반 일지가 그렇게 관찰을 토대로 기록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리소장의 몫이다. 내가 가끔 일지 내용을 콕 집어 물어보거나, 현장에 같이 가서 봐보자고 하는 것은 담당자가 저지를 수 있는 탁상공론식의 무사안일한 태도를 경계하는 의도적 제스처이기도 하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생각 언제나 나로 하여금 직접 보고 확인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어 주어서 실용적이다. 




   어제 폭우가 내리면서 집안 천정 곳곳에 물이 스며들어 여기저기 벽지가 젖었다며 민원을 제기한 입주자가 있었다. 옥상 바로 밑 20층 탑층 세대였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아 과장과 같이 직접 그 집을 방문하여 살펴보았다. 민원사항이 발생하는 경우 소장은 현장에 안 나타나고 직원만 보내면, 대체적으로 민원인의 불만이 크다. 소장이 와서 피해 현황을 직접 보고, 어떻게 처리해줄 것인지 책임 있는 말을 해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불만을 잘 알기에 나는 가급적 직접 현장에 가서 보고 들어보자는 주의다. 내가 경험과 기술적 식견이 부족해서 가급적 최 과장과 같이 간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입구 천정 가장자리 부분이 물에 젖은 흔적이 뚜렷하게 보였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세대주는 아이들이 쓰는 작은방 두 곳의 각각 물에 젖은 천정과 벽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하였다. 이어서 거실로 나가 보았다. 천정 중앙에 직사각형 모양의 큼직한 형광등 세 개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중 가운데 등에는 물이 가득하도록 스며들어 누렇게 차 있었다. 주변의 천정 벽지도 상당히 넓게 물을 먹은 채 젖어 있었다. 누수원인을 빨리 규명해야 했다. 그래야 보수비용 부담주체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과장과 같이 박공지붕 아래로 가서 방수 상태를 살펴보았다. 지붕과 벽 사이 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온 흔적이 역력하였다. 안쪽이 광범위하게 젖어 있기도 한 데다 빗물이 바닥으로도 흘러 내려와 여기저기 고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콘크리트 구조물은 조금이라도 금이 간 곳(크랙, crack)이 있으면 빗물이 벌어진 틈을 타고 마구 흘러가 의외의 지점에서 누수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집 천정 곳곳이 물에 젖은 피해는 이곳 박공지붕에서 물이 유입된 공용 부분 누수가 원인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럴 경우 도배와 전등 교체 등 인테리어 보수공사는 관리비를 사용해야 한다. 즉 관리사무소에서 보수공사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정기회의 때까지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입주자대표회의 대표님들께 톡으로 긴급 상황보고를 하였다.  집행이 불가피하다는 요지였다. 결과보고는 회의 시 당연히 해야 하는 수순이다. 일을 처리하는 순서를 두고 그 집 세대주와 잠시 언성을 높이며 승강이를 벌였다. 그는 조급하게 보수공사를 빨리 하자고 다그쳤다. 나는 지붕 방수처리가 급하니 그것부터 하고, 도배는 물이 더 이상 새지 않는 걸 확인한 하자고 맞섰다. 피해 당사자야 마음이 다급한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입주자 등이 부담하는 관리비를 민원인의 말만 듣고 무턱대고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최 과장이 중간에 센스 있게 끼어들어 중재하며 잠시 동안의 소란은 끝이 났다.




   오후 늦게 비가 잦아든 틈을 타 과장이 박공지붕 아래쪽 벌어진 에 실리콘을 쏴야겠다고 하였다. 같이 가자며 내가 따라나섰다. 밖에는 빗줄기가 가늘어져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과장 뒤를 따라서 최고층 세대인 20층을 지나 삼각형 모양의 박공지붕 위로 살금살금 기어 올라갔다.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씨에 20층 옥상의 경사진 지붕에서 우산을 펴고 서있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발바닥에 전율이 느껴지며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과장은 실리콘을 바를 부분은 지붕 가장자리 쪽 좁은 갓길을 지나서 가야 있다고 했다. 그는 나보고 그쪽으로 와달라고 말하며 그 길로 먼저 모퉁이를 돌아가버렸다. 난간도 없고 고양이 길이나 다름없는 옥상의 그 좁은 길로 나는 도저히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하나 잡을 데 없는 지붕에서 어질어질하여 아래나 주변을 쳐다보기도 두려웠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긴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최 과장이 어쩌면 오늘 나의 저승사자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순간 나도 모르게 하늘을 빠끔히 쳐다봤다. 바람이 제법 부는 가운짙은 회색빛 구름이 빠르게 밀려오고 있었다. 그게 무서워 보였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리고 "어~어~어~~!" 정신을 잃고 지붕에서 넘어져 20층 아래 바닥으 속절없이 추락해버렸다. 잠시 후, 마당 한편에서는 주민들이 몰려와 관리소장이 옥상 작업하다 떨어져 죽었다며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쯧쯧 혀를 차며 죽은 사람만 불쌍하게 됐다며 안타까워하는 모습들이었다. "최 과장, 나 거기는 못가, 못가! 나 다시 내려가 있을게"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안전지대로 내려와 최 과장이 작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우산을 쓴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20층 아파트 지붕에서 1층 아스팔트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하며 치를 떨고 었다. 




   우문현답한답시고 오늘은 내가 너무 나갔다. 일은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적재적소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다가 잘못되면 그 사람만 불쌍하다.  사람의 존재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어야 하고,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지금까지 상상 속의 이런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얼마나 다행인가. 불현듯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BC44)의 뒤를 이어 초대 로마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말이 떠올랐다. 죽어버리면 아무 소용없다는 그 말을. 맞아, 안전제일이다. 만기친람도 정도껏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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