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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Jun 29. 2022

전자 투표는 결코 마술방망이가 아니었다.

알면서도 나이브(naive)했던 나의 기대

   관리규약 개정(안)에 대한 전체 입주자 등의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가 막 끝났다. 과반수 찬성으로 확정이다. 개정안은 전체 입주자 등의 과반수가 찬성하는 순간 확정이 된다. 전체 입주자 등이란 단지에 주민등록을 하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소유자 또는 사용자(통상 세입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단지 내 거주자 모두가 대상이다.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란 전체 입주자 등이 개정안에 찬성하는 혹은 반대하는, 그 결과가 통과인지 또는 부결인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1세대 1 투표권이 있고, 대개는 입주자 명부에 등재돼있는 세대주가 행사하도록 선거인 명부를 작성한다. 통과 의결 정족수는 과반수 찬성이다. 이에 앞서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번 투표방식을 전자투표로 하고, 4일간 실시하기로 의결한 바 있다. 분회(分會) 소속 동료 소장의 경험담을 듣고 늦어도 3일이면 충분할 거라며 낙관하고 시작한 찬반 투표였다. 하지만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예정된 4일간의 시간을 모두 쏟아부었음에도 결과는 일단 찬성표가 과반수에 약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캬~~~, 아깝다. 조금만 더 도와주었으면 끝나는 것이었는데...' 동료 직원들과 전자투표 개표 결과지를 들여다보며 나는 자못 아쉬워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투표율을 높이기 위하여 중간중간에 허용되는 다섯 번의 독려 기회를 모두 사용한 뒤였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러한 사태에 대비하여 전자투표 개표 결과, 찬성이 과반수에 미달하는 경우에는 추가로 방문 투표를 실시하기로 미리 대비책까지 의결을 해두었. 그럼에도 관리 사무소에서는 전자투표로 쉽게 결말이 날 걸로만 생각하고 방문 투표 준비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결과가 예상외로 나타남에 따라 사뭇 당황스러웠다. 선거관리위원들에게도 송구스러웠다. 벌써 무더위가 느껴지는 날씨에 일일이 가정방문을 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부리나케 직원들을 동원하고 뒤늦게 서둘러 방문 투표 준비에 착수하였다. 경리주임은 찬반 투표용지를 만들어 그 수량에 맞게 일련번호를 매기고, 투표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이 전자서명 여부 분되는 선거인 명부를 출력하였다. 기전 주임은 A4용지가 담긴 골판지 상자로 투표함을 급조하고, 선거관리위원들이 소지하고 갈 볼펜도 예비로 챙겼다. 나머릿속으로 도상훈련을 실행하며 준비물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선거관리위원들에게도 연락을 취하였다. 위원장은 주민들의 양해와 협조를 구하는 내용으로 미리 구내방송을 해달라고 주문하였다. 'OK!' 경리주임은 선거관리위원들이 세대 방문 시 착용할 목걸이용 이름표를 캐비닛 깊숙한 곳에서 찾아내 가져다주었다. 나는 관리사무소로 모인 선거관리위원들에게 준비물을 차근차근 나눠주고 기전과장에게 구내방송을 하라고 신호를 주었다. 동시에 선거관리위원들은 각자 명찰을 목에 걸전자투표를 하지 않은 세대들을 찾아 직접 방문하러 나섰다. 나는 그 사이에 투표 현황과 집계표 등 투표 종료 후 선거관리위원들이 확인 서명할 수 있는 양식을 준비하며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저녁 7시부터 시작한 방문 투표는 9시가 조금 지나서 칠 수 있었다. 전자투표와 방문 투표를 종합한 결과는 겨우 과반수를 확보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정족수가 채워진 것이다. 관리규약 개정안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투표도 종료할 수 있게 되었다.




   곡절 끝에 투표절차를 마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하였으나, 전자 투표율이 왜 그렇게 저조한 지 나는 좀처럼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선거인의 카톡(SNS)에 투표용지 격인 링크가 배달되면 확인하고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바로 누른다. 다음 화면이 열리면, 사는 집 동호(棟號)와 이름을 입력하고 서명을 한다. 본인 확인절차다. 그러면, 찬성/반대 선택지가 나오고 표시한 다음 투표하기 버튼을 누르면 끝난다. 족히 잡아 단 30초도 안 걸리는 간편한 방법이다. 그런데 그게 왜 안 되는 것인 지 의아했다. 스팸으로 잘못 알고 회피할까봐 발신자가 누구(전자투표 운영 회사 이름)라고 미리 고지도 하였다. 전자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몇몇 주민들이 문의한 내용을 들어보고서는 내가 참 나이브(naive)한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투표에 앞서 법령과 규약에 따라 개정 제안의 목적과 내용을 일정 기간 동안 게시판에 공고를 하였다. 동시에 3단 비교표로 작성한 개정안을 인쇄본으로 제작하여 각 세대마다 배포하는 방식으로 개정작업과 절차, 그리고 추진일정을 모든 세대에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은 채 전혀 모른다는 듯 질문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왜 바꾸는 거냐, 무슨 내용을 어떻게 바꾼다는 것이냐, 개정내용을 알려줘야 투표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미리 공고를 하고 알렸느냐, 바뀐 내용의 요지가 뭔가,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인쇄한 걸 우리 같은 늙은이가 어떻게 알아보나? 그동안 정해진 절차대로 열심히 챙기고 진행한 일들을 이제 와서 되물으니 속으로는 짜증이 났다. 그렇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가급적 투표에 참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만큼 더 앞서 있었다. 과거에 동별 대표자나 선거관리위원을 역임하였거나, 혹은 지출에 예민한 소수의 사람들은 동대표와 선거관리위원의 회의 출석수당 인상에는 반대한다며 노골적으로 거부의사를 비치기도 하였다. 관리사무소로 전화를 한 어떤 아주머니는 뜻밖의 정치적인 색안경을 끼고 불신과 선입견을 거침없이 드러내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거 정권 바뀌기 전 ○○당에 유리하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투표하는 거 아니여? 뭔가 의심스럽네~" 도대체 관리규약에 정치색이 스며들 여지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원~. 내가 직접 받은 질문 중 압권이었다.ㅋ"아주머니, 정 내키지 않으시면 기권해도 됩니다. 자유롭게 생각하셔요"




   상식적으로 봐도 너무나 당연한 일을 근거 없이 낙관하다 마지막 날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투표용지 격인 링크(link)가 손 안의 핸드폰(Cell phone)에 전송되므로 손쉽게 투표할 수 있고, 따라서 투표율도 높게 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그 생각이 큰 오산이었다. 앞서 만나봤던 무관심 계층이 상당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신하며 기권하는 사람들, 알고서도 안 하는 사람들, 투표 기간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4일씩이나 되더라도 정말 바빠서 못했다거나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못했다는 사람 등등 그 밖에도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는 각양각색일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이고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보통°평등°직접°비밀°자유선거 원칙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공직 선거와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어서 이번에 입주자 등의 투표성향을 구분하여 특별하게 볼 이유는 없었다. 불참하고 기권하는 것도 역시 권리행사 방법의 하나이니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나무랄 일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문명의 이기와 그 사용을 과신하고 높이 산 착각에 빠지고 말았던 것 같다. 아파트 단지라면 어디서나 이러한 민주주의 활동이 수시로 이뤄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민초들의 경험이 꾸준히 축적되고, 앞으로 보안장치가 완벽하게 갖춰진다면 대통령도 전자투표로 뽑는 정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주택 관리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입주민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익히고 훈련하는 기회가 적지 않다. 각자 자유의사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 진데,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내가 좀 성급하였다. 어쨌든, 관리규약 개정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는 절차의 9부 능선을 넘을 수 있도록 협조해준 입주자 등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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