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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Jun 21. 2022

우리 소장님은 '돌부처'

1급 심리상담사 관리소장의 좌충우돌 분투기

   명색이 1급 심리상담사인데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을 한다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최소한 그런 자격이 없는 소장에 비하면 뭔가 다른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좀처럼 기회의 문이 열리지 않아 홀로 냉가슴 하던 시절, 이력서에 나의 경쟁력을 조금이라도 더 부각해보고자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던 흔적이. 주택관리사 자격증 외에 부가적으로 그런 자격증을 갖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고 환영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이는 그런 건 이력서에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 줄 더 넣는 것이 강점일까 약점일까, 아니 약이 될까 독이 될까. 나는 한때  방면에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품어본 적도 있지만, 여러 가지 제약과 여건상 어렵겠다고 일찌감치 결론지은 분야였다. 자격증만 갖고 있지 실제 그 방면에 종사해본 일은 없다. 비록 심리상담에 관한 실무경험은 없지만, 자질과 소양을 익히고 단련한 만큼 관리소장 역할을 하는 데에는 어떤 식으로든 보탬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1,200세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 관리소장으로 부임한 지 한 달 남짓 지날 즈음, 단발머리를 하고 금테 안경을 쓴 젊은 아주머니가 소장을 만나야겠다며 사무실로 방문을 하였다. 첫 손님이었다. 관리소장이 바뀌었다고 하면, 의례 무슨 용건이 있다며 꼭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걔 중에는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아 진짜 화가 난 고질 민원인, 과거 동대표 경력이 있거나 현역 마을 통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기꺼이 자신의 존재감을 심어주려는  , 새로 왔다는 소장이 과연 일을 잘할 만한지 간을 는 어르신, 회원이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이라며 은근히 영향력을 과시하는 SNS 리더, 다른 데서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며 동료의식을 살짝 드러내고 격려까지 해주는 사람, 앞으로 잘 도와달라며 약삭빠르고 정략적으로 접근하는 사람 등이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 아주머니와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다.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말을 교환하고 나서 얼마 안돼 아주머니는 따지듯 신경질적인 언사를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나는 오히려 차분한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머니의 두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가끔씩 몸짓과 말로 공감을 표시하며 그 사람이 나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쫑긋 귀를 기울였다. 상대방이 하는 말과 기분에 집중하며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도록 조단조단 주고받기를 잘하라던 심리상담 지도 선생님의 오래전 가르침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한참 대화가 진행되던 어느 순간, 아주머니는 흰머리가 많이 난 나의 몰골을 바라보며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옳거니!' 줄곧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른으로 대하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나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어느 날, 입주자대표회의를 이끌고 있던 독고 회장이 할 말이 있다며 나를 불렀다. 주민 몇 사이름직접 거명하며 앞으로 그들이 관리사무소 주변에 얼씬도 못하도록 사정없이 대해달라고 명령하듯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관리소장이 제발 좀 포악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직전 소장은 그것 하나는 잘했다고 비교하며 나를 거칠게 자극하였다. 사람 가리지 않고 누구나 받아주며, 겸손한 태도로 이야기를 나누의 행태가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주민들을 대표하는 회장이 설령 내키지 않더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포용적인 면모를 보여줘야 할 텐데, 왜 저러시나?'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지만, 그 자리에서 뭐라고 달리 항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도저히 그의 요구에 응해줄 수가 없었다. 그런 자질이나 성향이 나에게는 아예 없기 때문이다. 실습과 교육으로 심리상담사로서의 소양과 역량을 다진 배경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의 요구에 대답하는 대신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이고 말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그 사람들을 충분히 다룰 수 있다고 여전히 자신한다는 의미였다.



 

   과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사람이 찾아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알고 보니 나이가 나하고 동갑이었다. 그는 관리소장이 집행한 일에 대하여 관리규약과 공동주택관리 법규를 인용하며 문제점과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민원을 여러 차례 제출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를 요주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직접 만난 본 결과, 그는 의외로 매너가 있었고, 역시 관련 법규에도 밝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화가 되는 사람이었다. 이야기 소재가 아파트 단지 현안으로 확대되며 점차 길어졌다. 그는 독고 회장과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들과도 가깝게 지내며 물밑에서 서로 협력하는 사이였다. 그러한 정황을 알고 있는 나는 그에게 회장과 서로 화해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건 사실 독고 회장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고, 순전히 나의 생각이었다. 주민들 간의 반목과 갈등을 중단하고, 서로 손을 맞잡고 화합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보겠다는 선한 의도였다. 그는 소장인 내가 중간에서 그런 자리를 마련해주면 얼마든지 응할 생각이 있다고 화답하였다. 그가 돌아간 다음, 나는 곧바로 독고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어렵사리 승낙을 받아냈다. 1주일 후 관리소장실에서 셋이 같이 보기로 하였다. 이윽고 약속한 날짜와 시각에 세 사람이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만났다. 정확히 나의 역할은 중재자이자 옵서버(observer) 자격일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마련된 자리인 만큼 나는 어떻게든 접점이 만들어지도록 분위기를 돋우기도 하고, 중간중간 끼어들며 이야기를 이어 주기도 하였다. 지만, 두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서로 심한 언쟁만 벌이다가 얼굴을 붉힌 채 자리를 뜨고 말았다. "저 사람이 뭔가 꿀리는 게 있으니까 화해를 하자고 나오는 것이지 왜 그러겠소!" 잔뜩 화가 난 독고 회장은 노려보듯 나를 쳐다보며 한마디 핀잔을 던지고 사라졌다. 마지못해 응했을 뿐 처음부터 그 사람과 화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의중이었다. '내가 괜한 일을 했구나!' 허망한 결말이었다.




   "소장님, 저 다음 주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겠습니다." 한여름 휴가 시즌을 앞두고 기전과장이 갑자기 퇴사를 하였다. 사실은 나와 잘 맞지 않아 힘들어서 그랬겠지만, 능력이 달린다며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냈다. 고심하는 나의 속내를 눈치채고 알아준 것 같아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미안한 생각이 교차하였다. 후임으로 경험 많고 카리스마 있는 기전과장을 채용하였다. 이직 경력이 많아서 염려도 되긴 하였으나,  나와 성향이 대조적인 사람과 일한다면 나의 부족한 점도 보완하고 일의 능률도 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고심 끝에 선택한 인물이었다. 독고 회장은 비로소 적임자가 왔다며 그를 반겼다. 소장이 너무 점잖으니, 민원인들이 마구잡이로 관리사무소를 들락날락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내가 하지 않은 악역을 그에게 당부하였다. 기술분야 일에 어두운 나는 기전과장에게 힘을 실어주며 일을 제때제때 잘 챙기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채 두 달도 되기 전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가 관리사무소에 찾아온 진상 아주머니와 언쟁에 휘말려 결국 지탄의 대상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소장인 나도 지휘감독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곡절 끝에 내가 그만두었다. 나의 소식을 듣고 기전과장도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지고 훌쩍 떠나버렸다는 후문을 들었다. 직원들은 어떠한 경우도 화를 내지 않는 나를 보고 '돌부처 소장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하하하, 당신들은 아직도 나를 잘 모르잖아!' 나의 면전에서 직원들끼리 주고받는 그 말을 듣고, 나도 덩달아 재밌다고 빙그레 웃었다. 한편, 일 잘하고, 할 말 할 줄 아는 경리직 정 대리는 마냥 온화하기만 한 나를 불만스러워했다. 기회가 되면 가끔 쓴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제법 경력이 있고 드센 민원 현장 경험도 있는 정 대리가 들려주는 말은 내가 마음을 다잡는 데에도 참고가 되었다. 다소 듣기 거북하더라도 기꺼이 나에게 쓴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좋다. 내가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일이 생소하여 서툴다 보니 듣게 되고, 들어야 하는 말들이었다. 배울 점이 있다면 아랫사람의 말도 허투루 듣지 않는 스펀지 같은 마음을 잃지 않았다. 관록이 붙고 일에 정통하면 심리상담사의 역량이 확실히 강점이자 약이 되지만, 그러기 전에는 자칫 독이 되기 쉽다. 일 처리가 다부지지 못한 상황에서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는 결코 인정받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부인하기 어려운 건 무엇보다 심리상담사인 관리소장은 상대방이 누구이든 잘 듣는다는 것이다. 그는 경청에 익숙하고 습관화 되어있다. 대화를 기피하지 않고 우호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서비스업계에서 확실히 비교우위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 서비스의 기본이다. 고객으로부터 충분히 환영받을 만한 강점이다. 이런 사람은 경험과 실력을 쌓을수록 더욱 빛을 발하며 각광받게 될 것이다! 새로운 분야에 늦깎이로 입문한 처지에 겪었던 첫 경험은 강렬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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