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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Feb 05. 2023

아버지, 이제 일을 그만해야 할까요

65세 아들이 56세였던 아버지께

   내 아들이 첫돌을 지나 처음 맞이한 추석날, 아버지는 손자를 목마 태우며 마을회관 앞으로 걸어 나오셨어요. 아버지, 그때를 기억하시나요? 과묵한 성격 탓에 평소 말씀이 별로 없으셨지만, 그날만큼은 아버지 얼굴에 웃는 기색이 가득했어요. 아마도 속으로는 세상이 쩡쩡 울리도록 큰 소리로 웃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나도 이렇게 손자를 얻었다며 동네 사람들에게 한껏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역력한 표정이었거든요.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또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릅니다.  순간 누가 뭐래도  생애에 가장 멋진 장면이었고, 가장 완벽한 명절이었습니다. 일찍이 추사 김정희 선생이 가장 귀한 만남은 부부 아들딸 손자손녀와의 만남(高會夫妻兒女孫)이라고 일갈했다는데 거의 근접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영원히 잊못할 거예요. 그토록 아름다웠던 시간을 더 이상 재현할 수 없기에 이제는 오히려 가슴 아픈 추억이 말았네. 하늘이 허락한 부자지간의 인연이 불과 거기까지만이라 운명적 사실나는 곧 알아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채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는 그 기막힌 사실을 객지에서 전해 듣고, 마치 미친놈처럼 달려가했으니까...! 아, 벌써 오래전의 일이 되었네요.



 

   아버지, 며칠 전 그 손자가 다니는 직장에서 차장으로 승진했다고 기쁜 소식을 알려왔지 뭐예. 30년도 훨씬 지난 어느 추석 날, 아버지가 고향 집에서 딱 한 보듬아봤을  다시는  기회가 없었던 녀석이 이만큼 컸답니다. 많이 기쁘시죠. 어머니는 죽기 전에 손자며느리 보고 싶다며 나보다 더 손꼽아 기다리고 계세요. 승진보다는 결혼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지만, 코앞에 다가온 설을 앞두고 이 소식 아버지께 꼭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이번 설에는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지 않고, 대신 내가 동생들과 같이 내려가 뵙기로 했었습니다. 명절 때마다 몸소 올라오셨는데 이제는 연로하시고 많이 허약해지셔서 그냥 집에 계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혼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오가시기가 힘겹고 위험할 것 같아 겁이 나고 걱정이 앞섰습니다. 사실 집에 모실 궁리를 여러 날 여러모로 해봤지만, 머리만 아프고 복잡해서 차라리 엄마 마음이 편할 차선책을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참에 아들 녀석할머니께 세배하러 시골에 함께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옛날, 아버지께서 교사로 근무하시던 곳 인근인 율포에 콘도 1박 예약까지 해뒀더랬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동생들과 함께 설레며 기다리던 귀향 계획은 설을 불과 사흘 앞두고 완전히 무산되말았습니다. 엄마가 코로나19에 감염돼 병원에서 확진판정을 받은 거였어요. 엄마는 당신도 당황한 듯 불안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내려오지 말라고 전하고서는 나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습니다. 속이 상한 기분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미처 생각 못한 상황이어서 나도, 동생들도  충격을 받고 당혹스러웠습니다. 팔순의 엄마가 설 명절 기간에 격리되어 혼자 있어야 하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오 형제는 혹시나 그 사이 엄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하며 먼발치에서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습니다. 아버지, 이럴 땐 어쩌면 좋나요? 묻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평생 처음으로 설을 혼자 쇠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다 보니 불현듯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더 나더군요. 일주일간의 자가 격리기간 동안 곁에 아무도 없을 터이니 엄마 마음이 더 약해지고 서글퍼하실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설날 아침, 우리 네 식구는 핸드폰 스피커를 켜놓고 어머니께 전화로 세배를 드렸습니다. 찝찝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설을 그럭저럭 대충 보내고 말았습니다. 코로나를 앓고 난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힘이 빠져있었어요. 우리 오 형제가 매일같이 전화로 안부를 묻는 일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바야흐로 설이 지나고 격리기간도 끝났지만, 오 형제 중 누구 한 사람 다녀오겠다고 선뜻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저마다 지금 당장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퇴직을 하고 나서도 모두가 이런저런 일에 종사하고 있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형편이 썩 녹록하지는 않았니다. 어쩌면 장형인 내가 나서야 하지 않겠냐며 동생들이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 같기도 해 마음이 더욱 무거웠습니다. 지금은 다만, 아침마다 어머니께 각자 전화를 드리고 나서 카카오 단톡방에 느낌을 올려 공유하는 일이 전부입니다. 모두가 전화로 어머니의 건강상태를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죠. 이런 상황도 언제까지 허락될 수 있을 것인살얼음을 걷듯 불안하고 착잡하기만 합니다. 




   아버지, 어제는 일터에 나와서도 하루 종일 마음이 불안하고 괴로웠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홀연히 가셔 버리고 고향 집에 그대로 혼자 남겨진 채로 긴 세월과 샅바 싸움하듯 꿋꿋하게 살아오신 어머니시잖아요. 요즘 들어서는 목소리가 점점 쇠약해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인간의 영고성쇠(英古盛衰)를 어찌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조금씩 그 정도가 더해지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들아, 이제는 나 혼자 여기 있기가 힘이 드는구나. 다만 며칠 만이라도 내 자식이랑 같이 살아보고 싶다. 나 좀 데려가면 안 되겠니? 어머니가 저 멀리서 나에게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선뜻 응하지 못하고 냉가슴만 하고 있으니 가식과 죄책감으로 심히 괴롭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부터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일하다가도, 저녁 먹고 나서도 생각날 때마다 아무 때나 수시로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자주 하게 됐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래, 나 괜찮다. 엄마의 한마디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콩알만 한 내 마음이 놓이니까요. 어쩌면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까지 내가 일부러 시간을 끌짓궂게 강요하 것지도 모르겠습니다. ㅠ.ㅠ.



   당초 나이 60세 정년퇴직하면, 고향에 내려가 살 생각이었습니다. 상주하지는 못하더라도 2도 5촌식으로 도시와 농촌을 번갈아가며 살면 되지 않겠냐고 구상도 했더랬습니다. 시골에는 죽어도 못 간다고 선언해 버린 아내와 동행할 생각은 접은 지 오랩니다. 요즘은 농촌에 내려가서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TV프로그램을 보고서는 멋지다며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좌충우돌식 너스레를 떨기도 하지만요. 내려가더라도 그전에 아들 녀석 장가라도 보내야 할 터인데 자꾸만 늦어져 걱정입니다. 내가 결혼할 당시 아버지 나이보다 지금은 열 살을 더 먹었는데도 아직껏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를 어쩌면 좋아요. 그것마저지아부지 타고난 것이겠거니 나무랄 수가 없네요. 더 기다려줘야지 별 수가 있겠냐며 고개 떨군 채 아들 눈치만 살피고 있습니다. 내가 재취업한 일도 이제는 제법 능숙해졌어요. 규모가 소박하지만, 점점 돈 버는 단맛에 빠져드같아 걱정도 됩니다. 고향에 내려가면, 집에 책 냄새가 가득하도록 만들겠다는 생각은 여전한데, 과연 지금 같은 어지러운 생각에 사로잡혀 언제쯤 결행할 수 있을지 종잡을 수가 없네요. 아버지, 쓸데없는 걱정일랑 그만하고 이제 내가 일을 그만하는 게 옳을까요. 내려가면, 가장 먼저 어머니 모시고 유람하듯 전국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나이 들고 보니 아버지 생각 더 나고, 보고 싶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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