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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껌 Jun 14. 2023

이 시대의 플라토닉 러브

 거의 몇 년 만에 줌으로 만난 주마나는 어딘지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히잡을 쓰고 태권도를 하며 처음 만났을 때는 10대로 소녀티가 물씬 나는, 태권도 잘하는 당찬 친구였는데 히잡을 벗고 단정히 묶은 머리로 모니터 너머에 있는 그녀는 어느새 20대 중반이 되어가는 성숙한 모습이었다. 작년에 졸업을 하고 지금은 오만으로 돌아와 가족과 있다는 그녀는 작년과 올해 내내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며 기회가 되면 호주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교육 배경이 좋은 부모님 아래 사이좋은 6남매 중 넷째인 그녀는 내 기억으로 모든 인생의 결정이 가족 중심적이었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호주를 너무너무 좋아했던 나조차도 현재로서 딱히 돌아갈 마음이 없는데, 가족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그녀가 여러 가지 탐색을 해 보고 싶어 호주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을 때 무언가 직감이 들었다.      


 “주마나,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은데.”     


 30분 넘게 들뜬 표정으로 그간에 있었던 인생 얘기를 펼쳐놓던 그녀는 내가 알던 소녀의 얼굴로 돌아가서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긴 이야기야.”     


 정말로 긴 이야기였다. 오만시간 오후 2시, 한국시간 저녁 7시부터 시작된 줌 화상채팅은 9시 30분쯤 유료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아 3번이나 튕기고야 끝이 났다. 전화의 시작 전에는 배가 안 고파서 밥을 안 먹었는데 배고픔을 참느라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이유는 주마나가 너무나도 들떠있었고, 무엇보다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였다.      


 이미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뻔히 보이는 이야기들을 몇 차례 ‘이런 거구나’라고 스킵하려고 하면 ‘일단 들어봐’라던지 ‘그 얘기는 곧 할게’라는 식으로 말하며 어찌나 어깨를 들썩거리던지, 좋아하는 것에 푹 빠진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길고 긴 2시간의 러브스토리를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마나는 코로나 이후에 오만으로 돌아와 1년 넘게 온라인으로 학교를 다녔다. 코로나로 인한 조치들이 완화되자 그녀에게 장학금을 주던 오만 정부는 호주로 돌아가서 학위를 마치지 않으면 장학금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졸업까지 단 한 학기만을 앞둔 그녀는 호주로 돌아갔고 수업을 들었는데 한 수업에서 어찌하다 보니 한 남자와 두 명의 여학생들과 그룹 프로젝트를 했다. 그 남자는 (인생의 고민이 많아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나이가 30이었는데 그녀처럼 태권도, 주짓수, 복싱 같은 류의 운동을 매우 좋아해서 대화가 잘 통했다.]      


 “(‘음. 그래서 종강하고 사귀었다는 얘기군’) 오, 그래서 고백했어?”

 “일단 들어봐. 얘기가 점점 흥미로워져(getting spicy)”     


 그 이후에 쭉 들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내가 생각한 매운맛(spicy)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 비스무리 한 것도 없었다. 다시 이어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종강을 한 후 그가 ‘혹시 운동 같은 거 물어볼 것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 이후 어쩌다 보니 거의 매일을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메시지로 주고받았으며 오만으로 돌아오기 전 1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오만으로 돌아와서도 그녀가 그에게 오만의 과자들을, 그가 그녀에게 호주의 과자들을 소포로 보냈다. 그가 그녀에게 보내 준 레시피로 음식을 만들어서 그녀의 가족들이 맛있게 먹었다. 그녀가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주로 돌아갔을 때도 똑같이 만나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거의 매일 연락을 하며 그게 처음 알고 지낸 지로부터 거의 1년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소 손을 잡는 일도 없었고, 서로 간에 ‘너를 좋아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저 ‘내 전 여자친구가 너와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난 너를 많이 아껴’ ‘넌 나에게 많이 중요해’라는 간접적인 말들이 난무했는데 그녀는 이 말들의 의미를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내심 K-드라마에 나올법한 직진 고백을 기다리는 듯싶었다.     


 “가족들이 알고 있어? 내 생각에 최소 언니가 눈치채지 않았을 수가 없는데?”

 들떠있던 그녀의 표정은 이내 굳어졌다.      


 “그게, 그 사람의 (친구로서의) 존재는 아는데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녀의 문화권에서는 여자가 먼저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몹시 어려운 듯싶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결혼할 상대가 아닌 이상 남녀가 연애를 한다는 사실조차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일단 단순한 친구라면 그렇게까지 연락을 하지는 않아. 너와 내가 친구지만 거의 2년 만에 제대로 연락하잖아. 1년 동안 매일 이런저런 사소한 연락을 주고받는 건 연인 사이에서나 하는 일이야. 그리고 그 사람이 너와 너의 문화를 매우 존중하는 것 같아(respectful). 너의 문화에서 정혼자가 아닌 이상 어떤 마음을 표현한다든지,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그런 것들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걸 이해하는 것 같아. 분명 마음은 늘 그런 걸 원할테지만 그런 것들을 하는 순간 너를 잃어버릴 걸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해.”     


 그녀는 내 말에 맞장구치며 오만으로 돌아오게 되어 헤어지기 전 안아줄 때 (호주에서는 친한 사이에 작별 인사로 포옹을 하는 편) 그가 매너손을 했다며 다시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토록 100% 순수한 러브스토리를 들은 지가 너무나도 까마득해서 중간중간 대화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줌이 우리를 세 번 튕겨내고 아쉬운 대로 메신저 채팅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녀는 내게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고, 들어주고 지지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내가 한 서포트는 단 하나였다.      


 “네가 어떤 직업을 가질지, 호주로 돌아갈지, 가족이 지지할지, 그 사람이랑 결혼할지 그런 거는 나도 잘 모르겠고, 확실한 건 그 남자가 너를 좋아해.”     




그림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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