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접의 맥락4
새들을 꾸준히 들여다보는 게 마냥 즐거운 건 아니었다. 아픈 새가 보이거나 새를 싫어하는 이웃이라도 나타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종종 답답하고 우울한 기분이 됐다. 이런 기분이 된 원인은 멧비둘기일 때가 많았다. 참새 새끼들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멧비둘기는 여름을 지나면서 여러 마리로 늘었고 생각보다 너무 많이 먹었다. 또 구수한 소리를 내는 정겨운 새라고만 생각했는데 웬걸 수시로 뿡뿡거리며 싸워대는 싸움꾼이었다. 녀석들이 싸우고 깃털이 날릴 때마다 우리 집 창틀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먹이를 놓지 못하게 될까 봐 마음 졸였다. 이제껏 나는 모든 새를 편견 없이 대한다고 생각했으나 멧비둘기는 예외로 두기로 했다. 녀석들이 투덕거리면 창문을 열어 쫓아냈다. 입으로는 새를 좋아한다고 나불거리면서 멧비둘기만 쫓아내는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고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랴, 멧비둘기 때문에 다른 새들까지 못 볼 바에야 멧비둘기만 쫓아내는 편이 나은 것을.
8월 말, 기세등등하던 더위가 시들해질 때쯤 창틀에는 두 마리의 다친 참새가 나타났다. 둘 다 연한 색의 어린 참새였다. 한 마리는 엉덩이 쪽이 많이 다친 것 같았고 한 마리는 오른발이 까맣게 굳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라 더 마음이 쓰였다. 엉덩이 부분 털이 피로 엉겨 붙어 있던 참새는 보기와는 달리 움직임이 아주 정상적이었다. 또 이상하리만치 먹이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잘 먹는 만큼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며칠 후부터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안 보였으니 죽었을 거로 짐작한다. 내가 매미의 외침으로 기억하는 여름은 새들의 탄생과 죽음으로 무성한 계절이었다.
발이 괴사한 참새는 가을이 되어서도 매일 창틀에 와서 먹이를 먹었다. 나는 이 녀석에게 ‘흑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까맣게 굳어 괴사한 발이 떨어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붓고 핏기가 보이다가 발이 덜렁덜렁 매달려 있기를 며칠. 분리된 자리가 꽤 아픈지 바닥을 딛는 게 불편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일주일 넘게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잘 살아낼 줄 알았는데, 흑발이도 죽었다는 생각에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힘들었다. 흑발이가 사라지고 9일째 되던 날,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나타나 평소처럼 먹이를 먹고 있었다. 건강한 듯한 모습에 괜히 눈물이 났다.
비단이가 아프면서 나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다. 대충 ‘겁’이 많아졌다고 표현하면 맞을지 모르겠다. 이건 마음속 어느 한 지점에서 나도 모르는 새 만들어졌는데 비단이가 떠나고 나서는 확 커져 버렸다. 이게 커지면서 내 마음은 한껏 위축됐기에 아픈 새가 보이거나 하면 작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흑발이로 인해 제멋대로 쪼그라든 내 마음에는 뭔가 변화가 보이는 듯했다. 생명이란 건 한순간 사라질 정도로 허망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흑발이가 보여줬다. 매일 흑발이의 안부를 확인하며 평화로운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1월에 발을 다친 박새가 나타났을 땐 우울감이 예전보다 덜 한 걸 느낄 수 있었다. 박새는 불편한 다리로 한 달 동안 우리 집을 오가다 2월 중순부터 보이지 않았다.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잘 살아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창틀의 새들을 관찰했던 1년은 <1일 1새 방구석 탐조기>라는 책으로 나왔다. 책 작업을 하며 이 시간을 다시 되새기고, 이후엔 40편의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며 또 되새겼다.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