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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생망 Sep 15. 2020

강약약강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열심히 사는 착한 동백이에게 막 대하는 옹산 사람들이 나온다. 술집 여자라며 막말하고, 대놓고 따돌린다.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지 않고 구경하면서 조롱한다. 동백이는 참다 못해 지역 유지를 고소한다. 고소할 때 데스노트처럼 서러울 때마다 썼던 일기를 들고간다. 동백이에게 데스노트가 있다는 사실이 동네에 알려지자 옹산 사람들은 동백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현실은 동백이네 마을처럼 강약약강이 아닐까. 내 첫 사회생활은 인턴이었다. 정규직이 되고 싶은 인턴. 열심히 하면 정규직이 될 줄 알고 기획도 하고 에디터도 하고 디자이너 역할도 했다. 회사에서는 세 가지 역할을 어찌나 잘 써먹었는지, 명함도 세 개나 파줬다. 명함에서 나는 그토록 원하던 정규직 대리였고, 에디터였고, 디자이너였다. 


최저임금을 주면서 이렇게 많은 일을 시켜주니 돈 주고도 못 할 인턴을 했다며 고마워하라고 했던 개소리가 떠오른다. 빌빌거리면서 고맙다고 백 번은 말한 거 같다. 그렇게 빌빌거려도 난 끝내 인턴이었다. 다른 곳에서도 착하게 대해줄수록 열정페이가 심해졌다. 배려하고 인내하면 호구가 됐다. 


사회생활은 동화같지 않고, 남의 돈 버는 일은 더럽다. 이 점을 깨닫게 되면서 나도 동백이처럼 데스노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노동법을 공부하고 녹음을 준비하면서 주변에 거절을 했다. 처음에는 거절도 어렵고 노동권을 주장하기도 어려웠다. 돈 주고 못 할 귀중한 경험을 하면서 돈돈돈하는 돈미새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권리를 주장하자 그들이 움찔하면서 바뀌었다. 착하게 대할 때보다 법 운운하면서 돈미새처럼 나가니까 권리를 챙겨주고 눈치를 봤다. 회사에서 오래버티고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순한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오래 버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단호함과 거절스킬이 있었다.


오래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태생이 차분하고 조용한 내향형의 사람이었다. 손은 느렸지만, 완벽주의가 있어서 오래 기다린 결과물은 최고였다. 그에게 누가 무리한 부탁을 하거나 무례한 말을 하면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건가 싶어서 여러번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려운 침묵의 시간 속에서는 무례한 말을 한 사람도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억겁같은 시간 동안 내가 말한 말이 잘못됐나 되새겨보게 된다. 그 중에는 무리한 부탁을 스스로 철회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말했다. 미안해' 


억겁같은 시간이 끝나면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생각이 길어졌네요. 그럼 그렇게 하시겠어요?' 또는 '아, 생각이 길어졌는데 이 부분은 안되겠어요' 말이 통째로 씹히는 줄 알았다가 반이라도 듣게 된 상대방은 왠지 모르게 기뻐하면서 답변을 받아들였다. 


이외에도 사회에서 오래 버틴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나름대로의 거절 스킬이 있고 정치력도 있다. 가장 최근에 관찰한 사람은 평소에는 목소리가 작았다. 하지만, 후배가 일을 못하거나 답답한 상황이 생기면 있는대로 소리를 질러 짜증을 냈다. 사무실이 쩌렁쩌렁 울리게. 그러고나면 뒤끝없이 평소의 목소리가 작고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뒤끝없이 후배에게 일을 차분하면서 사려깊게 가르쳐주기도 한다. 회사 내에서는 그 분이 폭발성은 있지만, 뒤끝없고 일 잘하는 좋은 평판을 내린다. 


결국, 성격이 어떻든 일만 잘하고 문제만 안 일으키면 장땡인 것이다.  관찰하다보면 누가 기어올라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때면 확실하게 선을 그어놓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밥그릇이 뺏길 때야말로 가장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시점이다. 내가 본 사회는 동화보다 동물의 왕국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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