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화. 시간의 질감: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하여 -
제8화. 시간의 질감: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하여
느티나무 아래에서 배운 기다림의 미학
매주 아내와 함께 동네 야산을 산책하거나 동해 바닷가에서 차박을 즐깁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 하나,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의 각도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입니다. 그저 빨리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오는 것만이 목표였던 시절에는 산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니까요.
문득 고향 악양골의 느티나무 아래가 생각납니다. 5월의 햇살이 쏟아지던 그 평화로운 풍경. 어린 시절 그곳은 만물상회를 운영하시던 부모님의 치열한 삶의 터전이자, 저에게는 세상을 배우는 최초의 학교였습니다.
전력 질주의 시대와 8년 전의 사색 (작가 저서 : 귀인의 필적)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시간이 참으로 야속했습니다. 반도체 장비 회사와 건설 자재 회사를 거쳐 영국계 글로벌 기업의 회계팀장으로 일할 때, 저는 매월 영국 본사에 보고할 방대한 분량의 리포트와 사투를 벌였습니다. 시간은 늘 부족했고, 저는 그 시간을 이기기 위해 잠을 줄이고 끼니를 걸렀습니다.
하지만 8년 전, 어머니께서 100세의 연세로 긴 방랑을 마치고 소천하셨을 때 저는 시간의 또 다른 얼굴을 보았습니다. 한 세기를 오롯이 살아내신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으며, 인생이란 얼마나 빨리 달렸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충분히 머물렀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5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막내아들이 장성하여 컨설팅 전문가가 되는 과정을 지켜봐 주신 어머니의 시간은 '느림의 힘' 그 자체였습니다. 12년의 IT 사업을 정리할 때도 , 그 결정이 '실패'가 아닌 '지혜로운 전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미래를 준비했던 여유 덕분이었습니다.
방향이라는 불변의 지표: 중년의 속도계
인생 후반전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젊을 때는 체력이라는 가변적인 요소에 의존해 무조건 앞으로 달려 나갔다면, 중년은 '방향'이라는 불변의 지표를 확인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교훈적인 팁을 공유하자면, 저는 매일 아침 '버려야 할 일 리스트'를 씁니다. 해야 할 일(To-do list)을 채워 넣는 것보다, 내 삶에서 불필요한 속도감을 걷어내는 것이 훨씬 더 창조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가장 가치 있는 곳, 즉 '지혜의 재건'과 '소확행'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변의 풍경을 더 세밀하게 관찰하며 목적지까지 가장 아름다운 길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늦가을의 커피가 더 깊은 맛을 내듯, 우리의 인생도 천천히 식어갈 때 비로소 진정한 풍미를 드러냅니다.
맺음말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라는 고유한 색깔로.'
다시 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