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화. 오래된 스케줄러의 빈 공간: 지우고 채우는 삶의 여백 -
제8화. 오래된 스케줄러의 빈 공간: 지우고 채우는 삶의 여백
서재 구석에서 먼지 쌓인 옛 스케줄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촘촘하게 적힌 회의 일정, 누군가의 이름, 그리고 빼곡한 마감 기한들. 한때는 이 빈틈없는 기록들이 나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훈장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 다시 들여다보니, 그 치열함 속에는 정작 '나'라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문득 페이지를 넘기다 마주한 텅 빈 여백. 그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 공간이 오늘따라 깊은 안도감을 줍니다.
우리의 삶도 이 스케줄러와 같습니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작가 또한 LCD 핵심장치 제조사의 기획팀장으로 근무하며 매출 1조 달성과 상장이라는 고속 성장의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했습니다. IMF라는 거대한 위기 속에서도 역발상의 리더십으로 인재를 영입하고 ERP를 도입하며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맹렬하게 달려온 청춘의 시간 끝에 남은 것은, 인생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절실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성장은 무언가를 채워 넣을 때가 아니라, 비워낼 때 시작됩니다. IT 사업의 정점에서 매출 성장의 한계를 감지했을 때, 작가는 집착 대신 '지혜로운 전환'을 선택했습니다. 12년간 일궈온 사업을 정리하고 경영지도사 자격증과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 디자인한 것은, 비워진 공간이 있어야만 새로운 꿈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60대에 접어든 작가는 '영원한 현역'을 꿈꾸며 AI를 배우고 글을 씁니다. 이것은 과거의 화려한 이력으로 여백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배움이라는 새로운 씨앗을 심기 위한 비움의 과정입니다. 아내와 함께 둘레길을 걷고 차박을 즐기는 '소확행'의 삶은, 스케줄러의 빈 공간에 그려 넣은 소박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커피 잔에 남은 온기가 여백 속으로 스며듭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만,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멈춤'의 시간이 우리를 가장 강력하게 전진시킵니다. 스케줄러의 빈 공간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라, 다음 장을 써 내려가기 위해 숨을 고르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삶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우리는 더 자주 지워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워진 자리에 타인의 성공이 아닌, 나만의 작은 행복과 지혜를 채워야 합니다. 오늘의 스케줄러에 나는 아무것도 적지 않기로 합니다. 그저 이 커피의 향과 창가에 머무는 햇살만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밀도 높은 하루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한 문장은, 가장 깊은 여백 뒤에 적힌다.'
모닝브루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