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화. 오래된 만년필의 잉크: 흘러가는 것과 남는 것 -
제12화. 오래된 만년필의 잉크: 흘러가는 것과 남는 것
[장면: 밤늦은 서재, 노란 스탠드 불빛 아래 만년필 촉이 종이 위를 구르는 소리]
오래된 만년필 한 자루를 꺼내 잉크를 채웁니다. 검푸른 잉크가 투명한 컨버터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은 마치 내 혈관에 새로운 생명력이 수혈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종이 위에 촉을 대자, '사각사각' 하는 기분 좋은 마찰음과 함께 글자가 새겨집니다. 디지털 시대의 키보드는 너무나 빠르고 매끄러워 생각의 속도를 앞질러 가지만, 만년필은 내 마음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잉크를 내어줍니다.
이 만년필의 잉크처럼, 우리 삶에도 결코 서두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작가는 《귀인의 필적》이라는 제목을 통해 '사람의 흔적'이 갖는 무게를 이야기합니다. LCD 산업의 기틀을 닦고 IT 사업의 정점에 섰을 때도, 작가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은 기술적인 수치나 매출액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진정성'이라는 잉크였습니다. IMF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역발상의 리더십으로 사람을 먼저 챙기고, 관계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은 그 진심이 결국 삶의 가장 단단한 기록이 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잉크는 종이 위에서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너무 서둘러 덮어버리면 글자는 번지고 엉망이 되고 맙니다. 우리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가가 40대에 겪었던 시련과 50대의 새로운 도전은, 삶이라는 종이 위에 번지지 않는 지혜를 새기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12년간 운영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경영지도사의 길을 선택했을 때, 그것은 과거의 성공이라는 잉크를 말리고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기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만년필로 쓴 글씨는 지우개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한 자 한 자에 책임감이 실립니다. 작가가 자신의 치부와 아픔까지 숨김없이 기록하며 자녀들에게 "너희의 뿌리가 얼마나 강인했는지"를 전하려 한 것도, 그 기록이 다음 세대에게 지워지지 않는 이정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삶은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 버리지만, 진심을 담아 새긴 문장은 누군가의 가슴속에 살아남아 다시 피어납니다.
서재의 창밖으로 밤이 깊어갑니다. 만년필을 내려놓고 방금 쓴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잉크가 스며든 종이의 결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화려한 업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조용히 스며들어 온기를 전하는 진심 어린 필적입니다.
"지워지지 않는 삶은, 손끝이 아니라 마음 끝에서 쓰인다."
'커피 한 잔의 철학' 연재 에세이는 다음 주 월요일에 이어집니다.
모닝브루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