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사랑이 추억을 불러오는 힘이 있는가 보다.
14살이던 여름의 한 일이 떠 오른다.
유천은 방학을 하자마자 평창으로 갔다.
반년을 그리워하던 손자와 할머니가 만나 함께 먹고 수다 떨고 바라보며 며칠을 꿈꾸듯 보냈다.
행복도 계속되면 지루해지는가 보다.
새로운 즐길거리를 찾아 나섰다.
멀미로 버스를 탈 수 없는 할머니와 유천은 2시간을 걸어 5일마다 열리는 평창 장으로 나들이를 갔다.
오른편엔 남한강의 여울물이 하얀 물거품을 만들며 흐르고 왼쪽엔 기암절벽, 위로는 흰 구름이 뭉개 뭉개 떠 있는 파란 하늘, 그 아래로 구불구불 펼쳐진 신작로를 둘은 타박타박 걷는다.
유천은 강과 절벽 그리고 하늘을 두리번거리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꼬부라진 할머니가 기우뚱하게 서서 허리를 펴는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할머니 괜찮아?" 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손자가 기특해서일까? 사랑이 느껴져서일까? 행복스러운 웃음을 웃으며
“응 괜찮아!” 하시곤 손자를 그윽하게 바라보신다.
2시간 동안이나 쉬다 걷기를 반복하며 마침내 평창 장에 이르렀다.
손뼉 치며 발 구르며 "골라 골라" 소리치는 쉰 목소리의 아저씨, 북과 징과 꽹과리 치며 호객하는 아저씨, 개똥아 소똥아 헤어진 일행을 찾느라 부르는 요란한 음성들, 깎아 달라 밑진다 실랑이하는 생존경쟁의 소음 속에 유천과 할머니는 부분이 되었다.
할머니는 유천을 위해 사 줄 거리를 찾고, 유천은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여기저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웃거리다 발길을 옮길 수 없게 하는 하나를 발견하곤 멈추어 섰다.
평창 강 맑은 물에 살고 있는 매자, 쏘가리, 꺽지, 뱀장어, 모래무지 어름치를 상상하며 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다루기 쉬울 듯 한 낚싯대 하나를 잡았다. 가지고 싶은 것을 찾아 기뻐할 것이란 기대에 미소 지으며 할머니를 바라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할머니는 유천이 들고 있는 낚시 대를 넘겨받아 있던 자리에 아무 말 없이 놓는다.
유천은 직감으로 거절을 느끼고
"낚시하고 싶어요. 내가 제일 가지고 싶은 거예요." 애처로운 눈빛으로 할머니를 조른다.
손자의 간절한 애원에도 할머니는 아무 대꾸 없이 유천의 손을 잡아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다.
유천은 잡힌 손을 빼려 몸을 비틀며
"다른 친구들은 다 낚싯대가 있는데 나만 없어요." 조르고 또 조르지만 허사다.
손자가 요구하는 것이면 존재 가치의 즐거움을 느끼며 무엇이든 들어주시던 할머니 이신 데.
유천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다 머리를 왼쪽으로 힘없이 떨군다.
그리곤 할머니 몇 발짝 뒤에서 입술을 삐쭉 내밀고, 두 팔은 덜렁덜렁 늘어뜨려 흐느적거리며 따라다닌다.
덩달아 입이 닫힌 할머니는 애꿎은 돌들을 걷어차며 따르는 손자를 힐끗힐끗 돌아보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도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고개를 타래 미고 흐늘거리며 따라오는 손자를 할머니는 힐긋거리며 상한 마음으로 2시간을 걸어 오두막 집에 도착을 했다. 거절하고 거절당하여 마음이 상한 둘은 저녁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하고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3년이 지난 지금, 영원한 나라로 할머니를 보낸 유천은 그때 서운 했던 감정은 말끔히 사라졌는데 철없어 할머니에게 준 상처가 되살아 난다. 낚시 대를 사 주면 어린 손자가 위험한 물가에서 많은 시간 보낼 것이 염려되어 거절할 수밖에 없는 아픔,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여 상처받는 손자를 보는 할머니의 상처받은 마음이 증폭되는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할머니의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하다.
자신을 위해 매일 골방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시던 모습, 손주들의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을 유일한 낙으로 여기신 애틋한 사랑, 방학이 끝나 집으로 돌아간 손자를 그리워하며 흘리셨을 눈물을 잊고 산 무지함과 매정 함이 뜨거운 눈물 되어 양 볼로 주르륵 흐른다.
덩달아 나온 콧물이 함께 흘러 범벅이 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흐느끼는데 마음의 변화가 인다. 할머니가 믿던 하나님이 자신 안에 계심이 느껴지면서. 할머니의 가슴속에 계시던 하나님이 유천에게 옮겨 오신 것일까? 할머니의 사랑이 하나님이 믿어지도록 능력을 행한 것일까? 아름답고 오묘한 자연을 보면 믿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성경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볼 때면 믿음이 사라져 방황하던 유천이 새로워진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는데 세상이 왜 이러냐며 가졌던 불신을 해결할 결심이 선다. 수많은 질문들을 신학교에 들어가 답을 얻는 일이 인생의 우선임이 확신이 된다.
상처는 본래 사랑과 기쁨과 창의력 그리고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빼앗아 간다. 협력하고 조화를 이룸에서 오는 관계의 행복, 말하고 싶은 욕망, 먹고 싶은 욕구와 살고 싶은 본능까지도…. 그래서 상처를 받으면 받을수록 이성을 잃고 복된 가족과 우정의 관계를 깨고 외로움 가운데 산다.
그러나 상처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희생한 사랑을 철들어 알았을 때 그 상처는 오히려 생명력의 원천이 된다. 상처 준 사랑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는 더욱. 유천은 할머니가 바라던 신앙생활을 질문의 답을 얻고 확신한 가운데 할 결단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