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기까지
평안과 여유와 감사가 넘쳐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지 전능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며 평화와 여유와 감사가 사라져 버렸다. 논리와 이성이 머리를 지배하며 신앙의 방해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난 친구들 몰래 도둑고양이처럼 교회를 숨어 다녔다. 미워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거짓말하는 내가 성스러운 교회를 가는 것이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혹 친구들이 교회 가는 나에게 "어디 가냐?" 물으면 "저-어기" 하며 턱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그러곤 우울해져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걸었다.
불편함이 불평을 낳고 의심을 부채질했다. 왜 도둑놈, 사기꾼들이 이리도 많은데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전지전능하신 능력은 언제 쓰려는 것일까? 가난으로 힘겹게 사는 사람, 사고로 억울하게 다치고 죽는 사람, 젊어서 병든 사람을 왜 못 본 체하는 것일까? 선하고 정직한 자가 오히려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도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에덴동산 중앙에 먹음직도, 보암직도 한 선악과나무를 심어 놓은 것일까? 유혹에 넘어갈 줄 뻔히 알면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무얼까?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죄인 취급을 하는 이야기를 읽을 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다. 책도 사 읽어 보았다. 하지만 어느 것도, 누구도, 시원하게 답해 주지 않았다. 믿으라고만 했다. 의심은 사탄이 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의심을 풀어주지도 않고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만 하면 어떡하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러기에 난 너무 하찮은 존재였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와 환경에 굴복해 믿기지 않는 것을 믿으려 종교 행위를 열심히 했다. 감정을 뜨겁게 하여 확신에 이르려 버둥거렸다. 기적을 보여 주든지, 꿈에라도 나타나 '내가 살아 있다'는 한마디라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신비한 기적 부스러기는 개꿈에서조차 나타나지를 않았다. 불쌍해서라도 나타날 만하건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벌고 출세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하지만 선한 일로 존재가치를 높이고 싶은 욕망이 한구석에 남아 나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난 하나님과 딜했다. 수단과 방법은 접고 선한 일만 할 테니 내 욕망을 이루게 해 달라고. 하나님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오히려 실패의 아픔을 안겨주었다. "차든지 덮든지 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난 둘 다 온전하게 할 수 없음을 알고 다시 방황을 했다.
방황이 의심, 호기심, 궁금증을 부추겼다. 죄 있는 곳, 무지한 곳, 논리 없는 곳에서 의심이 발아되고 영혼을 성숙하나 보다. 질문하고 또 질문하며 논리가 인도하는 데로 따랐다. 문학의 옷을 입은 성서가 보였다. 생존과 선한 가치와 쾌락의 욕망을 품은 세상과 똑같은 나의 내면도 보였다. 이런 세상을 이끌고 있는 진리가 보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소하고 시시한 작은 것들의 모임인 것도 보였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격과 능력이 다르고, 생명의 신비를 품고 자라며 각기 다른 아비투스가 형성된 인간이 보였다.
이러한 인간과 세상을 이끄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업치락뒤치락하며 갈등과 다툼 가운데 낯선 인생이 되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래서 알베르트 까뮈는 "뫼르소"를 통해 평생 "이방인"처럼 살다 사형수가 되는 인간을 그린 것 아닐까?
난 나와 관계 맺은 사람들과 사회를 온전히 알 수 없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으로 형성된 고유한 성품과 "아비투스"를 이해하며 그에 맞는 한마디를 하려고 했다. 온전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사랑이라 여기고.
점점 눈과 귀가 밝아지는 듯했다. 잃었던 평안을 다시 찾았다. 나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리며 칭찬하며 용기를 주는 듯했다.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야"라면서. 그리고 "서로 다른 컴퓨터가 '프로토콜'로 하나 되는 것처럼 상황 속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에 맞는 사랑의 언어를 찾아 사용할 때 평화의 도구가, 진정한 친구가 되고, 세상에서 유익한 존재가 되는 행복을 누리게 되지"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