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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토리 Sep 27. 2019

너의 탓이 아니야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안영이


드라마 <미생>의 안영이는 ‘남초직장’ 종합상사에 수석으로 합격한 유일한 여성 신입사원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고 차가워 보일만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낑낑거리면서 무거운 물건을 들면서도 도움을 거절하는 당당한 캐릭터였다. 그런 안영이가 같은 팀 남성 상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수선 맡긴 구두를 찾아오라거나 담배를 사오라는 심부름처럼 남성 상사들이 시키는 사적인 일을 해야 했고, 회의실 테이블을 치우는 허드렛일도 견뎌야 했다. 노골적인 괴롭힘이 계속되자 똑똑하고 당당했던 안영이는 점점 어리숙한 ‘신입’으로 변해갔다. 


직장 내 괴롭힘은 개인 간 갈등의 문제가 아니다. 갈등은 쌍방의 충동을 의미하지만, 괴롭힘은 일방적이다. 일방적이기 때문에 행위자와 피해자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안영이는 누가 봐도 피해자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드라마 <미생>을 다룬 칼럼 등을 보면, 따돌림을 당한 안영이를 분석한 글이 대부분이다. 


자신에 대한 질투 정도는 가볍게 무시했던 안영이는 오직 실력으로 회사에서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고,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여성성을 부정하며 ‘남성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모든 면에서 완벽해지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당차고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 됐지만 “여자랑 같이 일 못 하겠다.”라는 합리적이지 못한 비난에 점점 무너져갔다. 남성 중심적인 조직에서 안영이는 스스로 여성성을 지웠기 때문에 수석으로 합격할 수 있었지만, 결국 여성이었기 때문에 따돌림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종합상사에서 벌어지는 직장 내 괴롭힘을 보면서, 언론은 안영이가 괴롭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안영이의 역사를 분석할 뿐, 남성 중심적인 조직문화와 가해자인 남성 상사들이 문제라는 점은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직장인 A의 이야기


단순히 안영이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일까. 비슷한 상황은 현실에서도 되풀이된다. 근로자 A는 자동차 딜러 일을 시작한 사회초년생이었다. 학자금 대출도 갚고 자립하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가진 A였다. 딜러 일이 험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A는 고가의 차를 판매할 정도로 노력했고 일정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던 A가 갑자기 자살 시도를 했다. “무엇을 해도 축구공처럼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며 굴러다녔”지만, 상사의 폭언은 계속됐다. “너가 언제까지 버틸지 두고 보자”며 위협적인 행동으로 겁을 줬고,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조롱거리로 만들기 일쑤였지만, 당하는 것 말고 A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난 바보야.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인가봐.”라며 A는 두 번째 자살 시도를 했다. 폭력과 폭언에 길들여진 A는 무기력에 빠져,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 같다. 당장 퇴사하라는 주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1년을 채워 퇴직금이라도 받아야겠다며 A는 위태로운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A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냐며 A의 엄마가 상담을 요청했다. 


A와 안영이는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청년으로,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똑똑했던 안영이는 어리숙해졌고,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자립하겠다고 말했던 A는 두 번이나 자살시도를 했다. 일련의 이야기 속에서 A와 안영이가 지독한 괴롭힘을 당해도 될 만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지만 언론은 안영이의 역사에 주목하며 어릴적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 온 안영이의 방어기제가 ‘신입’답지 못해 미움을 사거나, 결국 ‘남성’이 되지 못해 차별을 받은 것이라 분석했다. 



너의 탓이 아니야


군대문화에 기반을 둔 남성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문화와 집단주의적 문화는 길고 단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 내 괴롭힘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게 쉬울지도 모르겠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를 무능력하거나 사회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 취급하는 건 마치 성폭력 피해자를 ‘꽃뱀’취급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일을 잘 못하면 교육을 통해 잘 하게 만들고,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조직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모든 걸 회사 탓이라고 할 수 없지만, 사용자가 가진 인사권으로 근로자를 채용했다면, 그 인사권을 이용해 근로자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건 권리에 상응하는 사용자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됐다. 괴롭힘이 법으로 금지됐고, 앞으로 괴롭힘은 불법이다. 간편하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서 괴롭힘을 당할 만한 원인을 찾는 건 멈춰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괴롭힘이 더 이상 개인 간 갈등이나 성격, 사회생활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남성 중심, 성과 중심, 그리고 집단주의적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구조의 문제라는 공감대 위에 만들어졌다. 괴롭힘을 당할 만한 사람은 없다. 괴롭힘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만 존재할 뿐이다. 


“사람을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것만큼 잔인한 게 없는 것 같다.”는 근로자 B의 말처럼, 직장 내 괴롭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고통스럽다. 직장갑질119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시행과 동시에 직장인들을 위한 십계명을 발표했다. 그 첫 번째가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이다. 직장 내 괴롭힘은 괴롭힘이 발생하도록 방치한 조직 문화와 괴롭힘 행위자의 인성 탓이다. 혹은 월급을 줬으니 마음대로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천박한 인식 탓이다. 못된 상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스스로를 바보라 탓했던 A와, 점점 어리숙하게 변해갔던 안영이의 상처와 자존감이 회복되길 바란다. 


공익단체 직장갑질119의 직장갑질 대처 10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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