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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토리 Nov 07. 2019

괴로움일까? 괴롭힘일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 우위성

상담을 하다보면 “제 사례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근로자를 제법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신고기관이 별도로 있는 게 아니라 속 시원한 대답을 할 수 없을뿐더러, 징계나 해고처럼 특정 처분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떤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솔로몬처럼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또한 직장 내 괴롭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일이다 보니, 개인이 가진 역치에 따라 괴롭힘이라고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봐도 괴롭힘인 경우가 있는 반면, 괴롭긴 하겠지만 법이 보호하는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을만한 것들도 있다.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즉 직장 내 괴롭힘은 ①우위를 이용한 행위 ②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은 행위 ③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 이렇게 세가지 요건을 충족했을 때 성립한다. 



직장 내 괴롭힘 정의에서 가장 핵심은 ‘우위성’이다. 우위성은 지휘·명령 관계에서 상위에 있는 경우를 의미하는 지위의 우위를 기본으로 하면서, 직접적인 지휘·명령 관계에 놓여있지 않더라도 회사 내 직위나 직급체계상 상위에 있는 경우까지 포함된다. 타 부서 상급자도 행위자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지위의 우위성을 판단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반면 수적 측면, 나이와 학벌·성별·인종 등 인적속성, 근속연수나 전문성 등 업무역량, 노동조합 가입여부, 감사·인사부서 등 업무가 갖는 직장 내 영향력, 고용형태 등 지휘·명령 관계가 아니더라도 통상적으로 우위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경우 등 관계의 우위성이라는 개념에서도 접근할 필요가 있다. 


“후배가 저에 대해 거짓말하고 투명인간 취급을 해요. 거짓말하는 후배를 신고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후배의 거짓말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받았고 근무환경이 악화되긴 했지만 우위성을 검토한다면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볼 수 없다. 종종 후배나 동료의 괴롭힘으로 고통받고 있다며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직장 내 괴롭힘의 핵심은 우위성이기 때문에 이런 사례는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 후배가 남성이거나(피해자가 여성인 경우) 인사팀 소속이거나 사용자와 특별한 친분을 갖고 있거나, 또는 여러 명의 후배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엔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지위의 우위성은 없지만, 관계 측면에서 우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억지로 술을 먹여요. 회식은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괴롭힘이라고 할 수 있나요?” 

물론이다.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이라는 장소적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업무의 연장선에서 회식 자리에 참여한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회식 참여를 거부할 수 없는 개연성이 있었다면 장소적 범위에 한정해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라고 판단할 이유는 없다. 특히 고용노동부 매뉴얼은 16개의 직장 내 괴롭힘 예시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근로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음주나 흡연, 회식 참여를 강요하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한편 직장 동기들과의 자연적인 모임에서 술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이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보긴 어렵다. 우위성이 없기 때문에 회식 참여나 음주를 강요하더라도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이 처음으로 법에 정의된 만큼, 보호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각 요건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게 필요하다. 고작 한 문장에 불과한 정의규정이지만 문장을 쪼개가며 직장 내 괴롭힘으로 포섭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는 것이 곧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확장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법이 인간을 담을 수 없지만, 적어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통받는 근로자들의 '비빌언덕'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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