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문화다> 2015년 6월 30일
1.
외환위기의 절망과 밀레니엄의 기대감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교차하던 1999년, 드라마 <학교>는 학교폭력, 교권붕괴, 입시지옥, 임신, 촌지 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큰 이슈를 몰고 왔다. <공룡선생>부터 <사춘기>,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나> 등 다양한 청소년 드라마가 있었지만 프리미엄 시간대에 미니시리즈의 형태로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교실을 그려낸 <학교>가 주는 충격은 신선함과 경악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이듬해 <학교 2>가 연이어 제작되며 시작된 <학교> 시리즈는 수많은 작가와 PD, 배우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마지막 네 번째 시리즈로부터 14년의 시간을 지나 돌아온 <학교 2013>과 <후아유-학교 2015>(이하 <후아유>)는 이전 시리즈들을 계승하는 동시에 이미 시효가 끝나버린 것 같았던 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알려왔다.
두 편의 드라마는 시리즈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PD와 작가, 배우들은 물론 기본적인 구성과 서사를 풀어나가는 방식 등이 상이하게 다르지만 ‘학교’가 주는 어떤 감정들은 여전히 그대로인 듯하다. 오죽하면 가장 끔찍한 악몽이 군대와 학교에 다시 가는 것일까. 적어도 한국에서 학교는 군대와 동일한 곳인 동시에, 어떤 아련함과 향수가 뒤섞여 있는 공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각자가 기억하는 학교의 모습은 다르겠지만, 지금 여기로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학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누군가에겐 아름답지만, 누군가에겐 고통스러운 기억들 사이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드라마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실한 역할을 우리는 <학교>를 통해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
<학교 2013>은 폭력사건으로 유급한 과거를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 고남순이 학교에서 겪는 일들을 다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남순은 매사에 무관심하며 그저 졸업이 목적이지만 그의 주변에서는 왕따와 폭력, 교권붕괴 등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졸지에 학급회장까지 맡게 되며 남순은 여러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거기에 과거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원수가 되어버린 흥수의 전학으로 남순의 일상은 혼란스러워지기만 한다.
마치 홀로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있던 남순과 달리 교실을 지배하는 것은 힘과 재력과 성적이다. 이 실제적인 힘의 논리에 따르면, 교실의 최하층은 기간제 교사인 인재다. 때문에 일진 정호가 인재의 손을 부여잡아도 그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일상적인 풍경일 따름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감히 말할 수 없는 교실의 풍경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학교 2013>의 시선은 선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다. 일진인 정호가 강남의 인기 논술강사인 세찬의 자퇴종용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장면에서 교실의 논리는 극대화된다. 학교 밖 사회에서는 자신이 세찬보다 아래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학교 2013>의 학교를 진정 학교답게 만든 것은 교실의 질서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어딘가 모자란 듯한 행동으로 왕따를 당하던 영우에게 교장의 폭언이 들리지 않도록 귀를 막아줄만큼 따뜻함을 가진 남순이 교실의 질서에 지쳐갈 때쯤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이제는 원수가 되어버린 흥수가 전학을 온다. 중요한 것은 남순과 흥수의 화해가 아니라 남순이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는 사실이다. 영우에게 읊어주는 남태주의 시 <풀꽃>도, 흥수에게 들려주는 잘못의 고백도 남순이 스스로 써내려가는 일종의 ‘자기서사’다. <학교 2013>은 그저 무관심하게 교실 뒤편에서 엎드려 잠만 자던 남순에게 학교란 어떤 공간인지, 그리고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가는지에 대한 절실한 기록이다. 때문에 남순을 둘러싼 풍경은 어느 순간 학교를 넘어 삶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입시가 끝나고, 학교에 가지 않아도 여전히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한편 <후아유>는 기존의 시리즈들과 다르게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출생의 비밀, 왕따, 기억상실 등의 설정을 전경화시킨다. 통영에서 강소영에게 왕따를 당하던 이은비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시도를 하지만 단기 기억상실에 걸리게 된다. 마침 통영으로 수학여행을 와있던 고은별이 실종되면서, 똑같이 생긴 이은비는 그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게 된다. 은별이 된 은비는 좋은 집, 따뜻한 엄마, 훈남 소꿉친구에 둘러싸여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것 같았지만, 은별이 봉해놓았던 수인이에 대한 기억과 소영의 전학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고 은비였던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내며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은비는 소꿉친구 한이안과 또라이 공태광과 삼각관계에 빠지고, 가출한 쌍둥이 언니 은별이 돌아오면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삼류신파극으로 빠질 수도 있는 설정의 함정들 사이에서 은비가 찾아낸 해답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은별 혹은 은비의 문제들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흥미롭게도 거울을 바라보는 행위, 즉 나를 보는 것이다. 통영의 은비에게는 가해자와 보살펴야할 동생들에 둘러싸여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볼 기회조차 없었지만, 은별이 된 은비는 끊임없이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몇 번이고 확인한다. 여기에 한이안과 공태광은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상황마다 언제나 은비(때로는 은별)를 지지해준다. 소영의 압력과 협박에 은비가 다른 누구의 도움없이 스스로 맞설 때, 그리고 그것이 은별이 아닌 은비 자신임을 발견할 때 은비는 비로소 해답을 얻게 된다.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비로소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은폐와 회피가 아닌 <후아유> 만의 해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3.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김애란, 「서른」 중에서
이제 조금 잔인한 이야기를 해보자. 드라마 밖의 세계에서 학교는 다양한 속성을 내비치고 있다. 학교는 말 그대로 권력관계의 작동이 가장 유연하게 작동되는 공간(웹툰 <유쾌한 왕따>)이자, 대입 추가점수를 위해 전쟁에라도 나가야하는 공간(웹툰 <방과 후 전쟁활동>)이며, 굴욕적인 폭력을 통해 게이, 왕따, 일진도 바람직한 학생이 되어야하는 공간(연극 <바람직한 청소년>)이다. 그런가하면 가장 먼저 어른의 질서를 체험하는 공간(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과 세계의 멸망 앞에서도 폭력의 굴레가 멈추지 않는 공간(소설 <핑퐁>) 역시 학교이다. 이 지독한 상상력의 무대가 학교인 것은, 우리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이 공간이 가진 잔혹한 속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사회를 가장 먼저 가시화시켜주는 공간인 동시에 가장 압축적으로 사회를 체험시켜주는 공간이다. 모든 문제의 근원처럼 여겨져 때로는 손쉬운 해답으로 기능하는 대학입시는 오히려 그 질서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이 질서를 내면화하고 이 흐름에 거스르지 않는 바람직한 어른이 되는 방법을 모두가 학교에서 배운다는 사실이다.
<학교 2013>에서 보여지는 교실의 논리가, <후아유>에서 다다르는 진실의 구조가 생경하지 않은 것은 현실의 그것이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TV 속의 학교는 현실의 잔혹함을 우회적으로 압축시킨 무대가 된다. 이제 학교는 ‘삶’의 문제가 ‘생존’의 문제로 치환되었음을, 그리하여 버티는 것 말고는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징후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배를 움켜쥐고 “괜찮다”며 “그냥” 학교를 향하는 남순과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자신의 과거와 마주해야했던 은비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며,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때문에 <학교>와 <후아유>가 제시하는 세상은 이상적일지언정 가볍지는 않다. 예컨대 학교는 영우와 정호, 혹은 이안과 태광 나아가 교사인 세찬과 준석을 통해 외부로 그 외연을 확장시켜 거기에도 또다른 삶이 있다는 우회로를 제시한다. “가방이 너무 무거”워 자살을 포기했던 민기, “나쁘게만은 살지 않”겠다며 자퇴하던 정호, 은비를 위해 외국 유학을 떠나는 은별의 모습은 학교 밖에도 여전히 ‘삶’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여기가 생존의 늪이 되어버린 공간일지라도,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하는 공간은 아니라는 <학교>가 건네는 위로일 것이다.
남순이 흥수를 통해, 은비가 은별을 통해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마주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드라마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법을 목도할 수 있게 된다. “시 한 줄 쓴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듯이, 드라마 한 편 본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드라마를 볼 것이고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를 둘러싼 관계의 매듭들을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드라마와 같이 극적인 것은 아닐 테지만, 드라마는 가장 절실한 삶의 무대가 될 수 있기에.
<학교>의 6번째 시리즈가 막을 내렸다. 한국의 드라마 계를 지탱하는 작가들과 수많은 청춘스타들이 <학교> 시리즈의 유일한 성과는 아닐 것이다. 16년에 걸친 6개의 이야기들은 TV가 건넬 수 있는, 혹은 드라마가 우리에게 건넬 수 있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헌사다. 우리 모두는 학교에 갔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을 찾아 학교를 떠났다. 요컨대 <학교>는 누구나 거쳐 왔던 학교가 끔찍한 기억일지라도 그 시간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나아가 그 시간조차 각자의 무게가 실려 있는 ‘삶’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