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문화다> 2015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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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의 오늘을 되돌아보는데 빼놓지 않아야 될 것들이 있다. 긴 시간 동안 안방극장을 가득 채웠던 애정물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에 시청자들은 피로감을 호소했고, 이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요구했다. <겨울연가>를 비롯한 애정물의 국제적인 성공에 더 이상 기댈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 내놓은 해답은 ‘막장’과 ‘추리’였다. 막장과 추리가 서로에게 생경한 형식인 것만큼이나 2000년대 이후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 역시 극단적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기존 한국 드라마의 서사적 관습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막장과 한국식 드라마와의 결별을 고했던 추리 열풍은 새로운 드라마에 목말라있던 시청자들을 다시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냈다.
사실 한국 드라마의 이런 흐름은 크게 세 가지의 조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첫 번째는 텔레비전의 주된 시청자 층의 중장년화, 두 번째는 지상파 채널의 전반적 시청률 하락과 케이블 채널의 약진, 마지막은 미드의 영향이다. 이 세 가지의 조건은 미디어의 변화라는 환경적 요인과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로 기능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2000년대 이후 한국 드라마의 방향을 큰 틀에서 가늠할 수 있는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면, 드라마의 움직임이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난 시기는 2008년 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임성한, 김순옥의 드라마뿐만 아니라 <꽃보다 남자>(KBS, 2008)와 같은 트렌디 드라마에서도 논리적 개연성과 사실적인 묘사로부터 과감하게 비약을 감행한 ‘막장’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반면 작가주의를 표방했던 작가들은 처참할 정도로 낮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추리에 대한 관심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은 2010년이었다. <마왕>(KBS, 2007)이나 <신의 저울>(SBS, 2008)처럼 매니아층을 겨냥한 드라마들이 시작된 것은 2008년을 전후한 시기였으나 비로소 추리가 화제의 중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싸인>(SBS, 2010)에 이르러서였다. 애정서사를 2선으로 후퇴시켰음에도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던 <싸인>은 한국에서도 추리물이 가능하다는 상징적인 기록을 남겼다.
정리하자면 이명박 정권이 시작되던 2008년을 전후로 해 막장과 추리가 웰메이드와 저급이라는 상이한 형태로 새로운 감성의 영역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이 글에서 세세한 결들까지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만 가장 확연하게 눈으로 드러나는 변화의 지점을 짚어내는 것은 어느정도 가능할 것이다. 2000년대가 성과적인 측면에서 막장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지만 시청자들이 느꼈던 감정은 원초적인 쾌락과 환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히려 추리라는 형식을 통해 삶과 사회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었지만 그들만의 매니아 필드라는 인상까지 지울 수는 없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2010년대는 이러한 흐름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되 사회적․정치적 변동 속에서 미묘한 틈을 노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2015년의 한국 드라마는 어디쯤 와 있을까. 추리와 막장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일까. 그런 점에서 본격 추리 수사물을 표방한 <너를 기억해>(KBS, 2015)와 제목부터 막장의 분위기를 가득 담아낸 <어머님은 내 며느리>(SBS, 2015)는 흥미로운 지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소 무리한 설명이 될 수 있지만, 막장과 추리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해 가는지 그 변곡점은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에 대한 단서들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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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억해>는 어릴 적 싸이코패스로 의심받아 지하실에서 양육된 이현(서인국)이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현은 아버지의 살해범이자 동생을 납치한 연쇄살인범 이준영(도경수)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메일을 받고 귀국하여 특수범죄팀의 자문으로 수사에 참여한다. 범죄학 교수이자 프로파일러로 성공한 이현은 여러 사건 속에서 이준영과 실종된 동생 이민(박보검)이 남긴 싸인(sign)을 찾아 나선다.
수사물의 외형을 띠고 있지만 이현에게 중요한 것은 은폐시켜두었던 기억과의 대면이다. 프로파일러인 아버지와 면담중인 이준영과 비밀을 공유했던 이현은 그 때문에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쌓이고 단기 기억상실증에 빠져있다.상실된 기억의 조각을 찾아 무모할 정도로 사건 현장에 끼어들었던 이현 뿐만 아니라 이민과 이준영, 차지안(장나라) 역시 기억에 집착한다. 이민은 형제의 기억을, 이준영은 친구의 기억을, 차지안은 짝사랑의 기억을 이현에게 투영시키고 퍼즐의 조각을 계속해서 던져준다. 이걸 조립하고 완성시키는 것은 이현의 몫이지만 그는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와 실종된 동생의 잔영과 함께 옛 집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내면에 걸쳐있는 어둠을 직조해내는 서사와 사건현장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담한 연출 사이에서 모아지는 기억의 조각들은 이현이 살인사건과 대면해야하는 조건들을 만들어낸다. 기억의 중심에는 이현의 인생 전반에 드리워져 있는 이준영의 그늘이 자리잡고 있다. 이준영은 탈옥 이후 이현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에 멈추지 않고 이민을 비롯한 고아들을 모아 스스로 아버지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자신을 버린 어른들을 살해하는 것으로 본인을 구원한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이 욕망하는 가장 정확한 아버지가 되려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준영이 어린 이현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은 아버지에게 배신당했다는 판단에서 나온다. 실제로 이현의 아버지는 이준영의 의도대로 이현을 싸이코패스로 의심하고 지하실에 감금한다. 이준영은 아버지가 되려는 판타지를 살인을 통해 실행한 자신과 이현을 강한 동질감으로 묶어내려 하고 이 욕망에 따라 이현을 한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찾지 않은 형에게 이민이 보내는, 아버지 상실이라는 같은 사건을 겪었던 동료에게 차지안이 보내는 기억의 조각들 역시 가족이라는 같은 판타지를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너를 기억해>라는 제목은 이현을 수신인으로 이준영과 이민, 그리고 차지안이 발신한 ‘아버지’에 관한 메세지인 셈이다.
망각과 기억의 파고 안에서 이현이 찾아낸 해결책은 새로운 ‘아버지-되기’이다. 이현은 자신이 상실한 아버지라는 존재가 타인들에게도 걸쳐져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향한 메시지임이 밝혀졌을 때 새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을 그 해답으로 내놓는다. 때문에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의 세계를 살인으로 부정했던 이준영과의 대결이 합당한 명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현은 아버지의 세계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적법한 ‘대체 아버지’인 셈이다. <너를 기억해>가 무너뜨리고 축조하는 세계란 대체 아버지가 자신의 역할을 깨달았을 때 가장 유연하게 기능하는 곳이다. 강력한 아버지의 권위 안에서 어린 동생과 여자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가족이라는 판타지를 실현시킬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제목부터 기이한 <어머님은 내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역전을 그리고 있다. 귀한 아들을 독차지한 유현주를 시어머니인 추경숙은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아들의 사망 이후에도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동거한다. 결국 각자 재가해 새로운 생활을 꿈꾸지만 유현주가 항렬 상 시어머니의 위치에 올라가며 역전된 고부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주된 줄거리이다.
막장 드라마의 계열에 놓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제목과 설정을 지닌 <어머님은 내 며느리>에서 관계 역전의 드라마는 (피)가학적인 소묘에 그치지 않는다. 유현주가 추경숙에게 구박받는 가장 주된 요인은 유현주가 아버지의 빚을 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아들 정수가 어머니 몰래 대출을 받는 상황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추경숙이 아들에게 집착하는 것도 애정없이 돈 때문에 결혼했기 때문이다. 현주의 오빠와 올케가 작은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빚을 갚아야 하고 정수의 고모인 염순이 경숙의 집에서 얹혀사는 것도 아버지의 부재가 주는 불안정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어머님은 내 며느리>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부재한 상태로 빚으로만 남겨진 존재다. 하지만 아버지를 상실한 존재들, 특히 여성들은 공백의 세계에 철저히 버려진 상태로 남는다. 남편을 잃은 현주가 시댁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경숙이 현주를 밖으로 보내고 싶어도 아버지의 세계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여기에는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않는 인물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하고 있다는 인식과 이로 인해 빚어진 갑을관계가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고부관계는 이러한 현실인식에서 새롭게 재정립되는 가능성이 비쳐지는 것이다.
결국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뒤집는 상상은 아버지를 상실한 인물들이 어떤 세계와 맞닥뜨려야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이 세계에서 시어머니로 대변되는 시월드는 괴물이 아니다. 오히려 괴물은 빚으로 이루어진 아버지의 세계, 이를 완충시켜주지 않는 사회다.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이 맞닥뜨려야하는 오늘의 세계는 이토록 비참하고 냉정하다.
이러한 세계에서 현주는 또 다른 대체 아버지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공백의 시간을 스스로 모색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때문에 정수와 함께할 때는 부당한 대우에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업보로 받아들이지만, 정수의 사망 이후에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다. 이때 경숙과 현주의 (피)가학적인 관계는 역전된다. 경제력의 유무와 함께 뒤틀린 관계에 대한 직시가 상하관계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때문에 고부관계의 판타지적인 재정립이라는 설정에 상관없이 기존의 막장코드를 우회하는 힘은 여기에 존재한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관계에 대한 권력의 유동을 짚어내는 방식이야말로 히스테리의 극적 발현에 의존하던 막장 드라마가 변화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이를 둘러싼 시청자들의 기대지평도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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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 <너를 기억해>와 아침드라마 <어머님은 내 며느리>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리와 막장이 2008년 이후의 사회를 해석하는 대중예술만의 새로운 준거틀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미묘한 균열 지점들은 세밀한 해석을 필요로 하고 있다. 질적인 평가 이전에 텔레비전 드라마가 전유하고 수용자들이 해석해내는 세계는 단일하고 균일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이 드라마들에서 언술과 발화만으로 남겨진 아버지라는 빚은 오늘의 세계를 인식하는 가장 명확한 징후다. 한국대중예술사에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거추장스러운 것일지언정 부재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2010년대의 드라마가 드러내는 무의식들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버지를 상실한 세대, 그리하여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세대들이 맞닥뜨려야하는 세계는 억압과 살인이 가득한 비열한 곳이다. 어쩌면 누군가 해주는 따뜻한 집밥을 그리워하는 것도,(집밥 백선생(tvN, 2015)) 엄마가 세계의 폭력을 해결해주길 원하는 것도,(앵그리맘(MBC, 2015), 미세스캅(SBS, 2015)) 이 아버지 없는 세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막장과 추리에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아버지의 부재는 좀 더 세밀한 분석을 요한다. 기저에 깔린 문제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경유하는 것이고 이는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서사적인 측면에서도 충분히 징후적인 변화의 조짐이기도 하다.
이현과 차지안은 결국 아버지의 부재를 처벌과 사랑으로 극복할 것이고, 추경숙과 유현주는 새로운 가족 찾기를 앞으로도 한참 계속해나갈 것이다. 이 뻔하고 뻔한 서사를 추동하여 종국에 봉합시키는 힘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있다는 사실까지 감출 순 없다. 아버지 되기와 또 다른 대안의 모색이라는 상이한 선택의 가치를 평가하기 이전에 좀 더 적극적으로 들여다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 사이에 가족이란 병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있으며, 쓰고 있습니다.
웹진 <문화다>에서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공저로 <신데렐라 최진실, 신화의 탄생과 비극>(문화다북스, 2015)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