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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Feb 03. 2016

일상과 지옥의 경계 위에 선 인간

웹진 <문화다> 2015년 11월 27일


평범한 일상의 풍경 



   “부장님, 그거 불법입니다.” 직원들의 해고를 지시하는 정부장(김희원 분)에게 수인(지현우 분)은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출신 과장의 입에서 쉽게 나올 수 없는, 말하자면 상사에 불복하는 하극상을 벌인 것이다. 이미 철옹성처럼 강력하게 구축된 회사의 시스템 안에서 수인이 선택한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은, 오히려 상식적이기 때문에 강력한 공포심을 끌어낸다. 수인의 단순한 대답은 결코 가볍게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던져져야 할 것이다. 상식적인 대답을 두려워해야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불법입니다... 전 못하겠습니다"

   <송곳>이 첫 장면에서부터 던지는 질문이 내내 불편한 이유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상부의 지시에 대한 불복종이 거북한 것이라면 문제는 쉬워지겠지만, 그 지시는 부당해고다. 1997년 IMF 체제 이후 한국의 경제 상황은 다소 복잡해져가고 있었다. 가계부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고 실업자의 양산과 글로벌 자본의 진출로 인해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해고는 말 그대로 생계가 더 이상 불가능해지는 사회적 살인이 된다. 애써 외면하거나, 노력이란 이름으로 애써 비난해야했던 문제에 대해 <송곳>은 정면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노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현실에 대해 은유가 아닌 직접적인 묘사를 택한 <송곳>은 단순한 메시지가 얼마나 강하게 울릴 수 있는지 보여준다. 취업과 해고, 노조와 사용자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선동이라는 획일적인 프레임 안에 갇힌 채로는 읽어낼 수 없는 다양한 결을 그려낸다. “제 스스로도 어쩌지 못해 기어이 한걸음을 내딛고 마는” 수인이 불편해진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상식적인 것을 지켜내는 데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로 하는지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불편할지언정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은 결국 이 ‘불편함’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송곳>의 무대가 감정노동의 최전선인 대형마트란 사실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상품들로 가득 찬 마트는 실상 감정조차 노동의 일부가 되어 월급으로 환산시키는 산술화된 공간이다. 이곳에는 고객님과 관리자, 그리고 “더했다 뺐다 하는 종이에 박힌 숫자”만이 존재한다. 개인의 욕구가 최대한으로 충족되는 대형마트는 <송곳> 속에서는 역설적으로 개인이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 된다. 평등하다고 여겨졌던 회사의 합리적인 시스템은 평등하게 숫자를 교체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제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군대로부터 도망쳐 왔던 수인이 회의실 밖에서 끝내 무너진 것은, 그가 사랑해마지 않던 푸르미 마트는 삶의 가장 내밀한 부분인 생계의 문제까지 후벼 팔 수 있는 잔인한 송곳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곳>은 그저 2003년의 어느 대형마트에서 일어난 평범한 일상의 풍경일 따름이다.   



구원의 이유, 희망의 증거 



   비단 푸르미 마트의 부당해고 지시가 아니더라도 수인은 언제나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다. 수인은 육사생도 시절 특정 정당에게 강제된 투표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면서도 퇴교 압박에 시골에 있는 부모님부터 떠올리는 연약한 인간이다. “가장 교활한 형태의 체제수호자”였던 훈육관의 회유에 쉽게 공포심을 떨쳐내는가 하면, 군과 회사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리들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끝내 제 손을 더럽히기 싫어하는 수인은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중산층의 얼굴을 하고 있다.  


   때문에 직원들의 부당해고를 막기 위해 노동사무소를 찾은 수인은 어디까지나 제 손 더럽히기 싫어 남의 싸움에 기웃거리는 죄책감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 이런 수인을 현실로 끌고 내려온 것은 구고신(안내상 분)이었다. 부진노동사무소를 운영하며 각종 노조를 법적으로 후원해주는 구고신은 학생시절에 당한 고신(고문)의 흔적이 몸에 새겨진 인물이다. 이런 고신의 눈에서 수인은 그저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얼치기 화이트칼라에 지나지 않는다. 


   허과장(조재룡 분)의 찍어내기로 인해 불법 접대로 퇴사를 종용받는 황준철(예성 분)에 대해 도덕적인 의구심을 품는 수인에게 고신이 내놓는 답은 간명하다.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 이 단순한 진리야말로 노동운동이 갖는 정확한 답이 된다. 때문에 기나긴 투쟁 끝에 복직한 차성학(김희창 분)에게 회사가 반복적으로 시키는 보람 없는 땅파기는 노동이 가진 모든 의미를 빼앗는 가장 잔혹한 행위가 된다. 노동을 빼앗긴 삶은 정상성을 획득할 수 없는 삶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가 단순히 밥그릇 문제에 국한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전의 수인이 애써 외면했던 “리얼 월드”는 노동운동에 국한되지 않는, 말하자면 도처에 깔린 일상적 삶을 자각한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리얼월드

   <송곳>이 그리는 노동운동이 현실에서 의미를 갖는다면, 그 의미는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헬-조선이라는 위악적인 언어가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일상이 파괴될 것이라는 위기감에 기반하고 있다. 수인이 찾아내고, 고신이 그려낸 상식적인 물음은 노동이라는 용어가 함의하는 일상적인 풍경을 전유하는 용기에 대해 말한다. 그리하여 <송곳>은 약한 자들의 연대가 미약하게나마 구원과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드라마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지옥에서 산다는 것 



   아기공룡 둘리가 20주년을 맞아 부천 명예시민이 되던 2003년, <송곳>의 원작자 최규석은 둘리와 친구들의 20년 후를 그려냈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둘리는 공장 노동 중 기계에 손가락이 잘려 더 이상 마법을 쓰지 못하고, 또치는 동물원에서 타조들에게 몸을 팔며 살아가고, 도우너는 연구실로 끌려가 해부를 당한다. 최규석이 그려낸 둘리의 20년 후가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둘리 일행 이외에도 도우너의 투자 권유에 넘어가 전재산을 날린 고길동, 교도소를 들락날락 거리는 희동이,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도우너를 천이백만원에 팔아넘긴 철수는 신자유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2000년대의 현실에 대한 우화적인 판본이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2015년의 최규석은 둘리가 겪었을 법한 노동현장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려냈다. 둘리는 육사 출신의 깐깐한 과장으로 변했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의 장막’은 미약할지언정 결코 약한 것은 아니었다. “노동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어도” 여전히 불법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비단 노조만이 아닐 것이다. 국민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익명의 사람들은 언제라도 복면 뒤에 감춰진 잠재적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있다.  


   OECD에 가입하고 G20을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어도 노동이라는 단어 사용에 민감해야만 하는 현실은 지금 여기가 언제라도 지옥으로 돌변할 수 있는 가능태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 노조 이야기가 과연 TV에 나올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은 제작진 뿐만은 아닐 것이다. “같이 일하다 다친 동료 하나 지킬 깡도 없는” 시시한 약자의 입장에서 기껏 드라마 한 편이 던지는 상식적인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것임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2015년의 대한민국은 ‘미생’과 ‘송곳’들이 남아있는 차가운 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우리의 이곳이 헬조선이라 불리는 것은 혼이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불만이 익명성이라는 복면 뒤에 존재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상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가 과연 방영될 수 있을지 걱정하는 현실이야말로 지옥됨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테니.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짐만 지세요."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쓰고 있습니다. 

웹진 <문화다>에서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공저로 <신데렐라 최진실, 신화의 탄생과 비극>(문화다북스, 2015)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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