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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Feb 06. 2016

세계의 절망과 위로의 드라마
<미생>과 <송곳>

1. 미디어 장의 변동과 드라마 전의 전개


  드라마는 방송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중예술 중 하나가 되었다. 1956년 HLKZ가 개국한 이래로 드라마는 방송국의 시청률 확보를 위한 콘텐츠인 한편, 일반 서민들이 비교적 제약 없이 즐길 수 있는 오락물이었다. 70년대 초반에 등장한 <아씨>(TBC, 1970)와 <여로>(KBS, 1972)의 신드롬 이래로 텔레비전은 ‘일상의 극장’으로 고급예술과는 다른 질감의 예술적 체험을 생생하게 실현시켜주었다. 때문에 드라마는 대중들의 평균적인 기대치와 의사소통을 반영하며 새로운 문화를 발빠르게 받아들이고 (재)구성하는 ‘대중예술’의 위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90년대까지 영화와 라디오 등의 미디어 장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던 텔레비전은 2000년대 이후로 케이블과 종편, IPTV 등의 등장으로 분화를 시작하며,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드라마의 위상 역시 미디어 장의 변동과 함께 급격한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40% 이상의 시청률을 넘기는 작품들이 수편씩 등장하고, 주인공의 대사 한 마디가 학교와 회사를 뒤덮는 드라마의 시대는 향수어린 아득한 기억 너머로 멀어져갔으며 대중예술로서의 위상 역시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 서게 된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세 가지 이유로 압축된다. 첫째 인터넷을 통한 다시보기의 활성화, 둘째 미국드라마의 시차 없는 유입, 셋째 케이블과 종편 등을 통한 채널의 다양화가 그것이다. 다소 거칠게 정리된 감은 있지만 현재 드라마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현상들은 위의 세 가지 요소로 봉합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예능 프로그램이 나름의 서사와 캐릭터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1인 미디어 형태의 인터넷 방송 등이 다양한 통로 역할을 하며 그야말로 선택의 딜레마를 낳을법한 전장戰場을 구축되었다. 


  90년대에 숱한 전설들을 낳았던 드라마는 미디어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지상파가 제공하는 표준들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객관적인 지표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한국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언제나 판에 박힌 설정을 재생산한다는 사실에 있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출생의 비밀, 불치병, 모든 설정을 무너뜨리는 로맨스 등이 변치 않는 코드로 자리 잡으며 드라마를 통한 문화적 체험의 지평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공유케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방송된 두 편의 드라마는 매우 흥미로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2014년 10월 17일부터 12월 20일까지 tvN에서 방영된 <미생>(김원석 연출, 정윤정 작)과 2015년 10월 24일부터 11월 29일까지 JTBC에서 방영된 <송곳>(김석윤 연출, 이남규/김수진 작)은 지상파 드라마가 아니어도 사회적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시대에 삶과 노동, 세대의 경계를 드라마적인 감각으로 터치해내며 세계의 심급으로 시청자들을 안내했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텍스트 내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삶과 노동의 절단된 단면을 예리하게 해부해낸 작가의식만큼이나 미디어 장의 다층적인 변동이 드러나며 텍스트의 외부를 둘러싼 격렬한 정서적 반응이 수반되어 있다. 


  물론 청년실업에 따른 신세대의 좌절과 위로는 2000년대 중반부터 꾸준하게 제기되던 문제들이었기에 이 좌절의 공기를 힐링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 상품들이 생산되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힐링의 이면에는 ‘허기’라는 특정한 정서적 반응이 매우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201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 공백은 더욱 커져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생>과 <송곳>은 좌절과 힐링의 시대 이후에 밀려오는 대중들의 정서적 반응을 정확하게 포착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노동과 삶을 다룬 두 편의 드라마가 방송되었을 때 수많은 기사와 평론들은 <미생>이 건네는 위로, 혹은 <송곳>이 그려낸 디테일에 주목했다. 때문에 두 텍스트들이 그려내는 것들은 판타지 내지는 현실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실재real로 손쉽게 재단되어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증폭시키는 (무)의식적인 ‘상품’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오히려 <미생>과 <송곳>을 둘러싼 ‘(무)의식적 욕망’을 은폐하는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이를 둘러싸고 만들어지는 담론은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바뀔 필요가 있다. 텍스트의 정서적 반응을 끌어내는 감정은 어떤 질감을 가지고 있으며 ‘텍스트-세계-시청자’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드라마 텍스트의 내적인 특성을 넘어 미디어 환경과 이에 따른 수용자의 재구성, 그리고 시대적 감성affect과의 조우가 걸쳐져 있는 복잡한 구조망이 섬세하게 얽혀있다. 요컨대 특정한 드라마를 둘러싼 정서적 반응을 통해 드라마 시청이라는 예술적 체험이 사회를 상상하는 방식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변화하는 시대의 ‘정서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또 하나의 문을 여는 작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2. 연대위로의 방식


  포털사이트 Daum에서 ‘직장인들의 교과서’로 불리던 웹툰 <미생>은 드라마화가 결정되면서 지대한 관심을 받아왔다. 한국 드라마가 숱하게 반복하는 막장코드, 출생의 비밀과 불필요한 로맨스 등이 원작의 아우라를 망쳐버릴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미 프리퀄 영화를 통해 나름의 세계관을 확고하게 구축한 <미생>의 서사가 한국드라마의 병폐에 패배할 것이라는 우울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던 것이 사실이다.(유사한 사례로 <치즈인더트랩>이 있다.) 어찌되었든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는 지상파 대신 케이블 방송국을 선택했고 드라마 제작진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파격적인 수手를 두었다. 


  최규석이 그린 <송곳> 역시 노동운동을 다룬다는 사실만으로도 포털사이트 Naver에서 화제의 웹툰이 되었다. 꼼꼼한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송곳>의 서사는 당위만을 앞세운 프로파간다propaganda물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냈다. 내용의 특성상 드라마화가 결정되었을 때 외압을 걱정하지 않은 팬들은 없었다. 비교적 노조에 호의적이지 않은 언론사인 JTBC와 손을 잡았을 때 작품 본연의 의도가 훼손될거란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생>은 웹툰을 접하지 못했던 30대 이상의 시청자까지 포용하면서 말 그대로 ‘미생 신드롬’을 일으켰다. 바둑 입단에 실패한 고졸 장그래(임시완)가 낙하산으로 대기업에 취직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일과 삶을 발견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연민의 감정을 넘어 삶의 깊은 고민까지 공유하게 되는 정서적 체험에 이른 것이다. 장그래에게 집중되었던 웹툰의 서사들이 입사동기인 안영이(강소라), 한석율(변요한), 장백기(강하늘)에게 분할되면서 드라마 <미생>의 서사는 장그래 혼자만의 것이 아닌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장그래가 오차장의 “우리 애”(2화)라는 말에 홀로 눈물을 삼키고, 판을 뒤엎는 과감한 PT 끝에 “우리 회사”(13화)라는 온정적인 수식어를 입에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것이 “혼자 하는 일이 아니란 것”(2화)을 깨닫는 성장의 발판을 딛고 있었기 때문이다. 웹툰의 장그래가 일과 관계를 스스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성장을 이루었다면, 드라마 속 장그래는 오차장(이성민)과 김대리(김대명), 그리고 입사동기들과 관계를 되짚어보는 방식으로 성장을 거듭한다. 장그래의 배경과 일의 방식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장백기가 장그래에게 건네는 “그래도 내일봅시다”(15화)라는 인사는 “우리, 같이, 계속”(14화) 일과 삶을 공유하고 싶다는 성장의 고백이기도 하다.

  우리의 발견은 “열심히 하지 않아 버려진”(1화) 세계 밖의 나를 기어코 ‘철옹성 같은 회사의 매뉴얼’(14화)이 불편하게 만드는 힘을 갖게 한다. 때문에 “이대로만 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는 거죠”(14화)라는 장그래의 질문에 시청자들은 한참을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회사(세계)로부터 다시 버려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과 바둑을 두고’(<미생> 프리퀄) 있다는 성장의 믿음을 공유할 수 있기에 출구 없는 우울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송곳>은 <미생>이 굴절시켜 놓은 중핵을 건드린다. “부장님, 그거 불법입니다.”(1화)라는 첫 대사가 이수인(지현우)의 입에서 뱉어지는 순간, 정부장(김희원)과 이수인을 둘러싼 공기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들조차 불쾌함과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대사들은 이 드라마가 결코 편안한 허구에 기대어 해결을 구하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수인의 명령불복종에도 회사는 직원들을 내쫓기 위해 비인간적인 처사를 지속할 때 외로이 섬처럼 떨어져있던 수인이 구소장(안내상)의 도움으로 우리의 존재를 인식할 때 비로소 회사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수인이 애써 외면했던 “리얼월드”(3화)는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의 문제였고, 비참하게 일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식들한테 보여질까봐 무서워”(6회)하는 가장 보통의 존재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모습은 엄연한 실재였다. 수인의 외따로 떨어진 삶이 정당한 싸움을 위한 연대로 전환되는 시점은 허과장(조재룡)의 찍어내기로 퇴사위기에 몰린 준철(예성)에게 도덕적 의심을 품는 장면에서다. 이런 수인에게 구소장이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4화)이 싸움의 진정한 목적임을 발화할 때 ‘우리’의 의미는 달라진다. 시시한 나를 위해 함께 싸워주는 고라니떼의 존재(2화)는 고통과 슬픔을 공유하는 감정의 연대가 가능해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송곳> 속의 문제들은 비현실적 사랑이나 완벽에 가까운 처벌이 아닌 비루하고 고통 받는 존재들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것에서 해답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이때야 비로소 오차장의 “안될 거”(14화)니 “욕심내지마”(2화)라는 조언은 날카로운 비수가 아닌 진솔한 위로로 돌아온다. 오차장 개인의 도덕심이나 죄책감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의 감정을 공유하는 하나의 연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고립된 개인은 섬에서 탈출할 희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수인이 공포에 떠는 노조원들을 향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짐만”(8화) 질 것을 요구하는 장면 역시 헛된 이상을 걷어낸 지극히 현실적인 위로가 된다. 이 현실의 지반을 무시하지 않을 때 드라마는 비로소 다른 방식의 위안을 건넬 수 있게 된다. 구원의 가능성은 이 보편적인 고통을 인식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두 편의 드라마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세계 밖으로 버려진 평범한 개인의 이야기다. 이미 현실의 버거움에 지친 사람들에게 기껏 드라마 한 편이 건네는 위로란 상실을 경험한 것이 모두라는 사실에 기반한다. <미생> 신드롬과 <송곳> 열풍은 지금 여기의 현실과 조응하며 만들어진 위로의 현상이다. 


3. 대책 없는 희망무책임한 위로


  주지하다시피 <미생>과 <송곳>을 감싸고 있는 것은 일과 삶의 관계에 대한 집요한 성찰이다. 인간은 누구나 노동과 떨어져 살 수 없으며, 사회적으로 생산의 영역에 들어가야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다. <미생>의 위로와 <송곳>의 문제가 나의 그것들과 멀지 않음을 깨닫는 것은 이 드라마들을 읽어내는 첫 번째 조건에 해당한다. 


  하지만 <미생>과 <송곳>을 이대로 해석해내는 것이 드라마를 이해하는 정확한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따지고 보면 청년실업에 대한 이야기는 200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제기된 문제였고, 연대의식 역시 트렌디 드라마의 탄생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해결책이다. <그녀는 예뻤다>(MBC, 2015)와 같은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사랑을 해결책이 아닌 하나의 권리로 인식하고 있으며, 오히려 (유사)동성애의 형태로 청춘들 간의 연대에서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생>과 <송곳>이 건네는 위로가 특별하다면, 그리하여 그 위로에 대중이 격렬한 반응을 보냈다면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미생>과 <송곳>이 건네는 위로에는 그 기저에 깔린 독특한 질감의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회사를 그만둔 김선배(민복기)는 오차장에게 “밖은 지옥”(15화)이라며 회사에서 버틸 것을 권유한다. 장그래부터 오차장까지 전쟁같이 반복되는 회사생활이 초라해지는 이 장면은 한 개인이 처한 사회적 위기를 환기시킨다. 비단 오차장뿐만 아니라 대리부터 계약직까지 회사에서 버텨내는 것만이 생존의 유일한 방법임을 암시한다. 여기에는 사내정치의 문제, 젠더의 문제, 계약의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사는게 정치”(16화)인 살얼음판 같은 전쟁터, 밀려나는 것이 곧 죽음인 지옥 위에 선 인간의 외연으로까지 확장된다. 여기 남아있는 것은 순수한 ‘공포’다. 



  <송곳>의 차성학(김희창)은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낙오된 인물이지만 기나긴 투쟁을 통해 복직에 성공한 인물이다. 하지만 복직한 성학에게 회사는 카센터 일을 맡기지 않고 의미 없는 땅파기를 시킨다. 성학만을 전담하는 부장을 새로 뽑고 노동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의미를 빼앗는다. 때문에 회사는 삶의 모든 의미를 소거시키는 가장 잔혹한 행위를 가하는 가해자가 된다. 회사라는 거대한 시스템, 그리고 그 내부를 떠나 생존을 생각할 수 없는 인간에게 지옥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심지어 투쟁에 성공한 인간이 사회의 복잡한 그물망에서 다시 낙오하게 마련인, 그래서 일터가 “그저 스쳐가는 정류장”(5화)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정확히 그려낸다. 여기에 남는 것은 순수한 ‘절망’이다. 



  <미생>과 <송곳>의 따뜻한 위로가 판타지라는 평가의 이면에는 떨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두 편의 드라마가 공유하고 있는 지점인 일과 삶의 미분화된 양태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운영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오로지 메쏘드 배우처럼 눈이 충혈 되도록 일을 하고, 그 성패에 따라 행복은 물론 생존마저 좌우되는 삶과 지옥의 경계에 서는 것이 익숙해진 시대를 살고 있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한동안 한국을 휩쓸던 멘토가 비난의 대상으로 변질된 것과 같은 급격한 정서적 변동이 자리 잡고 있다. 예컨대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를 통해 지친 20대의 멘토가 되었던 김난도 교수의 신간 <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의 독자평에는 유례없는 악플이 달렸다. 말하자면 멘토에 대한 신뢰가 배신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급격한 반응은 우리 사회의 ‘의사소통 체제’가 변화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데, 따뜻한 말 한마디에 위로를 얻던 청춘들이 수저와 지옥의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세계의 시스템을 절박하게 더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생존이 곧 성공을 의미하는 서바이벌 게임에 대한 기대조차 무너진, 말하자면 버티는 것만이 전부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헬조선Hell-朝鮮이라는 위악적인 단어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수저가 계급을 상징하는 폭력적인 상징이 될 수 있는 것도 공포와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시대의 정서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호다. 위로의 제스쳐마저 냉소와 분노로 변하는 이곳이야말로 일상인지 지옥인지 구분되지 않는 연옥煉獄은 아닐까. 


  라캉에 따르면, 현실은 환상-구성물이다. 현실의 불안정성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 틈(실재)이 메워지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믿는 현실을 일거에 붕괴시킬 수도 있는 이 실재를 틀어막아야만 우리는 삶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현실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환상에 의해 구성되고 지탱되는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 환상을 통해서만 세계의 실재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은 이미 지배적인 담론을 통해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지만, 미세하게 벌어지는 틈을 완벽하게 틀어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환상은 구조화된 형태로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현실의 억압이 가장 강력한 이곳이 바로 세계가 드러내는 증상의 공간이다. 노동이나 노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에 떨게 되고, 불법적인 일을 거부하는 것이 민폐가 되는 이곳이야말로 지옥의 표상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차장과 구소장이 현실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판타지적인 존재라면 역설적으로 이들의 존재는 현실의 불안정을 지탱하는 구조화된 무의식이다. 도덕적 신념을 가지고 약자를 배려하며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비현실적인 상사(혹은 아버지)의 이미지는 모두가 원하긴 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말하자면 세계의 공백과 같다. 모두 외따로 떨어져, ‘시련마저 셀프’가 되어버린 시대에 같은 판타지를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이를 구성하는 가장 순수한 공포와 절망이 전제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떤 간극으로도 메울 수 없는 세계의 본모습은 이렇게 판타지의 외장 너머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오차장이 절규했듯이 “대책 없는 희망이, 무책임한 위로가”(14화) 어떤 힘도 얻을 수 없는 절망의 시대와 구소장의 말처럼 “모두가 상처입고 떠나가는”(5화) 공포의 시대가 비로소 보편적인 삶의 양태가 되어버린 그런 세계 말이다.


4. 여기 절망의 시대


  종말의 징후가 동시다발적인 시대에 위로의 드라마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미생>과 <송곳>이 보여준 가능성은 희망적이지만, 그러하기에 더욱 절망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장그래는 오차장의 도움으로 중소기업의 정규직이 되었고, 수인은 구소장의 도움으로 함께하는 투쟁의 장을 열었지만 지금 여기의 현실은 여전히 녹록치 않으며 드라마를 통해 비치는 싸움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사는 세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우리는 취직을 못할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고 해고의 위험과 정규직과의 차별 속에서 그저 나 자신을 지키는 것조차 급급해진 비루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공포와 절망의 시대에 남은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듯싶다. 요컨대 끈끈하게 ‘우리’를 만들며 지옥에서 살아남을 환상의 공간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황폐화된 세계의 끝을 상상하며 현실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극단적인 상상의 공간을 마련하든지. 실제로 후자와 같은 상상력은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종말 이후의 삶을 다룬 미국 드라마 <The Walking Dead>나, 현실을 일격에 소멸시키는 일본의 ‘세카이계 セカイ系’물은 전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화가, 세세한 결은 다를지언정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따라 어떤 문제적 증상을 감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언제든 이유 없이 죽을 수 있는 침몰의 시대 속에서, 현실을 이해하는 것보다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운 절망의 시간을 모두가 통과하고 있다는 방증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결국 시청자들이 체감하는 세계의 ‘리얼리티’는 이전의 것과는 현격하게 달라져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끊임없이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리얼을 추구하고, 짜여진 대사와 우발적인 애드립을 구분하며, 카메라의 경계를 넘나들던 시청자들이 오차장과 구소장의 대사 한 줄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의 재현이 아닌 감정의 공유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오차장과 구소장이 기어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는 죄책감을 통해 세대와 계급의 격차를 무화시킬 수 있었듯이, 수많은 장그래와 이수인들은 판에 박힌 정책이 아니라 각자의 바둑이 존중되는 새로운 판을 욕망한다.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감정적인 반응에 겹쳐져있는 또 다른 진실을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의 체험이기도 하다. 이 판타지가 비루한 청춘과 무너진 어른들을 미약하게나마 지탱할 근거를 마련했듯이, 이를 가능케 하는 실재의 토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버티는 것조차 점점 불가능해져가는 시대에 <미생>과 같은 우화가, <송곳>과 같은 교본이 또 다시 탄생할지 확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사회를 뒤덮고 있는 감성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고, 그 불안정성이야말로 문화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지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한 사회의 정서구조는 복잡다단한 제도적 변동과 사회적 문제들이 중첩되고 분화되면서 끊임없는 형성과 소멸을 반복해 나간다. 그래서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욕망 아래 깔린 순수한 감정의 밑바닥을 손으로 짚어내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여기에 드라마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또 다른 문이 존재할 수 있다. 낭만적인 위로와 사랑의 기적마저 불가능해지는 시대에 섣부른 대답이 아닌 새로운 질문을 찾는 것 말이다. 그 문을 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레이먼드 윌리엄스, 성은애 옮김, 기나긴 혁명, 문학동네, 2007.

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옮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아즈마 히로키, 이은미 옮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2007.

아즈마 히로키, 김영심 옮김, 「우편적 불안들」, 동서문학, 2001 겨울, 415면.

윤석진, 「‘현실인 듯 현실 아닌 현실 같은’ 드라마」, 방송작가 107, 2015.

이영미, 「성공까진 바라지 않아, 그냥 버티자!」, 황해문화 86, 2015.

주창윤, 「좌절한 시대의 정서적 허기」, 커뮤니케이션 이론 8권 1호, 2012.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쓰고 있습니다. 

웹진 <문화다>에서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공저로 <신데렐라 최진실, 신화의 탄생과 비극>(문화다북스, 2015)와 <야누스의 여신 이은주>(문화다북스, 2016)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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