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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Feb 01. 2021

성장이 멈춘 세계의 꿈

2020 길위의 인문학 - <재난의 상상, 포스트 펜데믹의 사회학>

재난 이후의 세계     


    끝내 세계는 멸망했다. 게임이나 영화에서 볼법한 종말은 어느새 현실로 다가와 버렸다. 코로나-19의 전 세계적인 발병과 함께 세계가 그 기능을 상실하는 모습이 리얼타임으로 생중계되면서 망상 속에서 존재하던 파국에 대한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고통스러운 미증유의 재난 속에서 우리는 일상의 파괴와 함께 사유가 멈추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불러 일으킨 재난의 감각이 퍼지기 이전부터 우리는 재난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시도한 바있다. 1947년 알베르 카뮈에 의해 탄생된 소설 <페스트>는 페스트가 퍼진 알제리의 오랑시를 배경으로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잔혹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페스트의 위기에서 카뮈가 그리는 다양한 군상들은 일상을 벗어나 재난 위에 놓인 인간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문학적 성취를 의미하는 기표이기도 했다.

    <페스트>의 문학적 성과와는 별개로 재난은 전쟁, 경제위기, 세기말 속에서 여지없이 되돌아왔다. 천재지변, 전쟁, 좀비 등 다양한 형태의 재난은 늘 세상 안에 잔존해 있었고 사람들은 재난의 위기와 극복에서 서사적인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때 문화를 통해 되돌아온 재난은 정상성의 회복이라는 서사적 여정을 전제하고 있다. 이때의 재난은 근대의 과학과 공동체의 결속력 등을 통해 극복해야 할 일종의 통과점이었다. 따라서 재난-위기-극복(희생)-회복의 계열은 재난서사가 구축한 하나의 체계였고 이에 따라 서사적 특성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재난에 대한 상상이 변주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재난 이후의 멸망을 상상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변주되면서 극복 불가능한 재난에 대한 다양한 사유는 시작되었다. 재난을 통해 파국에 이르러 세계의 멸망이 미디어스케이프로 펼쳐진 이 독특한 현상은 소수의 매니악한 취향을 넘어 공통된 감성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제 사람들은 재난 이후를 상상할 뿐 이전으로의 회귀를 복기하지 않는다. 적어도 대중문화텍스트에서는 말이다. 이 기이한 현상은 가상의 재난이 현실에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과도 같다. 911 테러나 311 대지진이 가져왔던 충격 속에서 새로운 서사적 실험을 전개하는 사람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세계의 근본이 붕괴한다는 잔인한 사실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 역시 재난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와 최근의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재난은 항상 우리의 일상 속에 있었다. TV, 인터넷 등의 미디어를 타고 실시간으로 전파되는 재난들은 저개발국가였던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선 90년대 이후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정상성, 즉 일상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인간에게 재난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현실의 재난이 모든 대책을 무력화시켰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서사 속에서 재현된 재난과 달리 현실의 재난은 회복의 서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벽과 마주하게 만든다. 사유의 불능, 서사의 불능과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취해야하는 것일까.

진보를 향한 순진한 믿음으로 달려오던 사람들이 재난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던 것은 이 모든 것이 단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는 데 있다. 행복에 다다랐다는 안도감이 한순간에 절망으로 바뀌는 경험말이다. 이 절망 속에서 사람들이 떠올린 것은 세계의 끝이었고 서사의 불능이었다. 때문에 정상성의 회복이 불가능한 시대, ‘성장이 멈춘 시대’에 그 근원은 어떠했는가를 되묻는 재난서사의 질문은 현실의 재난과 상관없이 현실에 잠재된 불안과도 같다.

    때문에 코로나 팬데믹이 펼쳐지는 지금 여기의 세계에서 재난서사가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이제 재난서사는 성장의 무력함을 넘어 세계의 종말을 연결시키는 계열적인 상상력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극복을 전제로 했던 과거의 재난서사가 화려한 스펙터클을 과시하는 것과 달리 현재의 재난서사는 내면의 불안을 정밀하게 파고든다. 흥미롭게도 멸망한 세계에서의 일상이 주된 서사구조를 이루는 현재의 재난물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전환점을 읽어낼 수 있다.

    첫째는 사람들이 세계라는 틀을 인식하고 이에 맞는 서사양식을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워킹데드>의 원작자 로버트 커크먼은 그래픽노블, 드라마, 게임 등으로 무한하게 확장해가는 세계에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밝혔다. 각자 다른 작가와 제작진에 의해 창조된 텍스트들이 <워킹데드>라는 하나의 세계가 글로벌한 텍스트로 연결되는 현상은 좀비 팬데믹이라는 가상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하게 펼쳐진 <워킹데드>의 세계는 하나의 미디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픽노블, 드라마, 게임으로 넓게 펼쳐진 좀비 팬데믹은 수평적인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가상에 대한 공통된 설정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하나의 텍스트로 연결되는 장면은 팬데믹이라는 공통된 세계가 스스로를 확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워킹데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많은 좀비와 팬데믹,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말의 풍경들을 지탱하고 있다. 성장보다는 생존이, 발전보다는 버티기가 중요해진 달라진 삶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구현해해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둘째는 재난서사 안에서 리얼리티가 상이한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2000년대 이후 사람들의 현실감각이 아주 먼 것과 아주 가까운 것에서만 작동하고 있음을 진단한 바 있다. 한 순간에 세계를 멸망시키는 상상이 하나의 서사적 관습으로 고착되는 현상은 재난서사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가진 마음의 풍경을 황폐하게 재현하고 있다.

    일본의 세카이계에서 주로 보이는 서사들은 전쟁이나 천재지변같은 재난을 통해 세계의 멸망을 맞바로 실현시킨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관계나 정치적인 해석의 여지가 절단되어 있고 오로지 멸망과 그 이후의 세계에서 생존해가는 사람들이 등장할 뿐이다. 문제는 세카이계의 주요인물이 평범한 남성과 세상을 지키는 여성에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세카이계에서는 대체로 소심하고 유약하게 설정된 남자 고등학생이 있는 한편 특별한 이유없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로봇 등에 탑승해 전투를 벌이는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비현실적인 설정만큼이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비약적으로 전개된다. 세상을 구하는 여자아이와 유약한 태도로 현실로부터 단절된 남자아이의 관계는 세카이계를 지탱하는 중심서사다. 그 속에서 리얼리티는 두 사람 사이의 가장 내밀한 감정의 교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현실의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체계도 세카이계를 움직이지 못한다. 오로지 사랑, 그마저도 미성숙한 아이의 태도가 무너진 세계에서 가장 리얼리티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재난서사에서는 이러한 폐쇄된 감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세계의 멸망을 구축하는 원동력이 된다.

    재난과 파국으로 이어지는 대중문화 텍스트의 불온한 상상력을 흥미 위주의 결과물로 볼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살아가며 재난물을 향유하는 수용자의 관점에서 새롭게 두 가지의 반응으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생존, 선택의 순간들    

  

    클렘. 사람이라는 게 항상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건 아니란다.

클렘 왜요?

    왜냐하면 나쁜 일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때문이지. 그런 일이 매번 일어난 후에 제 정신을 추스리고 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다.

<The Walking Dead : The Game>(Telltalegames, 2012~2019) 시즌2     


    죽음 앞에 내몰린 인간의 본성은 과연 어떠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실험은 재난과 그 이후에 몰려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주는 황폐한 세계 그 자체일 것이다. 텔테일 게임즈가 제작한 <The Walking Dead : The Game>은 좀비 펜더믹 이후 무너진 미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살인용의자로 호송중이던 리(데이브 펜노이)는 좀비 사태 발생 이후 부모를 찾는 소녀 클레멘타인(멜리사 허친슨)과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다. 동명의 그래픽노블, TV드라마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 게임은 간단한 조작과 선택지를 고르는 것으로 진행되는 인터렉티브 어드벤쳐 장르다.

    이 게임이 집중하는 것은 좀비를 죽이거나 탈출하는 것이 아니다. 플레이어는 매 순간 리의 입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만 한다. 대표적으로 에피소드 1에서 허셜의 농장으로 피신한 리는 좀비에 둘러싸인 덕과 숀과 마주친다. 어떤 인물을 도와줄지를 선택하는건 플레이어의 몫이며 선택에 따라 서사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선택지를 고르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선택을 진행해야 하는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모두를 생존시킬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를 순없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이러한 선택은 계속 강요되고 모두가 행복하게 엔딩을 맞이할거란 희망은 무참하게 무너진다. 하나를 구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는 선택이 강요되며 <The Walking Dead : The Game>의 등장인물들은 플레이어만큼이나 비이성적인 선택을 연속적으로 내린다. 플레이어와 등장인물의 선의와 상관없이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잔혹함이야말로 곧 이 게임이 보여주는 핵심이다.      


    내가 떠난 뒤로 세상이 더 힘들어진 것 같구나. 그 세상에서 자라는 걔도 참 힘들겠지. 이제 아이를 키웠던 내 입장이 되었구나. 잘 하고 있니? 쉽지 않지.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하고 싶지만 살아남으려면 그건 힘들지. 세상이 막 변하는 중이라 난 그나마 쉬웠지. 하지만 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잖니.

클렘  모르겠어요. AJ가 자라난 세상은 끔찍해요. 이제 정말 끔찍해요. 옳게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The Walking Dead : The Game>(Telltalegames, 2012~2019) 시즌4


    시간이 흘러 무너진 세계에서 홀로 AJ를 키우며 버텨오던 마지막 시즌의 클렘은 환상 속에서 리와 재회한다. AJ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점점 버거워지는 클렘은 시즌1에서 리와 함께 있던 시절과 완전히 달라진 세상에 살고 있었다. 좀비 팬데믹의 세상에서 태어난 AJ를 보며 클렘이 느껴야 하는 끔찍함은 완전하게 달라신 세상에서 남겨진 자들이 조우한 새로운 삶의 조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클렘이 느낀 것만큼 플레이어에게 잔혹한 선택을 강요하는 <The Walking Dead : The Game>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일상이 무너진 세계에서 윤리적 선택은 가능할 것인가. 플레이어의 선택이 원치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게임적 경험은 좀비 팬데믹을 통해 현실의 윤리를 새롭게 질문하는 <The Walking Dead : The Game>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결국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는 일상이 무너진 세계에서 ‘생존의 윤리학’을 새롭게 구축하는 문제와 닿아있다. 물론 그 구축은 클렘-리-AJ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통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생존자들의 윤리는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박재연의 「좀비는 ‘가족’을 해칠 수 있을까? - <좀비딸>과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에 나타난 팬데믹과 가족」은 좀비를 소재로 다룬 웹툰 <좀비딸>과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를 비교분석하고 있다. 두 편의 웹툰은 좀비를 주된 소재로 삼고 있음에도 호러나 액션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딸과 닭이라는 상이한 소재를 좀비로 풀어내는 위의 웹툰들은 좀비 팬데믹이 펼쳐진 한국을 배경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오랜 시간 웹툰을 연구해오며 일상과 픽션의 경계를 성실하게 탐색해온 박재연의 통찰이 빛나는 부분은 팬데믹이 불러온 공적인 위기를 사적인 공간이자 공동체인 가족의 키워드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사적인 미디어를 통해 소비하는 웹툰이 그리는 팬데믹과 가족의 지형도는 2010년대를 살아온 1020세대의 무의식 속에서 달라진 가족에 대한 상상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음을 이 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구자준은 「웹툰 속 괴물들의 계보학」을 한국 웹툰에 등장하는 괴물을 리스트업하여 하나의 계열로 다시 쓰고자 했다. 한국의 웹툰에서 재난물을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 있다면 그것은 ‘괴물’일 것이다. 흡혈귀, 프랑켄슈타인, 미라, 좀비 등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이 현 시대에서 새롭게 소환되는 양상은 재난서사의 수용에 있어서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한다. 특히 좀비물의 성공 이후 한국에서 괴물과 관련된 콘텐츠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현실을 고려했을 때 구자준의 분석은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다.

    웹툰이라는 공통분모로 엮인 두 편의 글은 재난-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세계에서 사람과 괴물의 경계가 각각 다르게 재현되는 장면을 공통적으로 주목했다.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 그 과정에서 나와 세계의 경계를 새로운 윤리적 감각에서 해석하는 최근의 경향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다. 저자들이 직접 분석하고 있진 않지만 YLAB에서 오랜 시간 추진해온 프로젝트 슈퍼 스트링의 경우 재난을 일종의 유니버스로 창조하려 했다. 한국이 거대한 싱크홀에 빠진다는 <심연의 하늘>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아일랜드>나 <신암행어사>. <캉타우>와 같은 출판 만화에서 <부활남>, <테러맨>, <신석기녀>와 같은 최근의 웹툰까지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하려는 콘텐츠 기획이다.  이 과정에서 재난서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하나의 세계관으로 엮으려는 독자들의 욕망이 가시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재난이 아니면 불가능한 상상력이 미디어를 횡단하며 콘텐츠를 새롭게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석의 지점을 짚어내는 것은 매우 복잡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재연과 구자준의 글은 재난 속에서 생존과 선택의 순간들을 목격하고 싶어하는 기획자와 창작자, 독자의 욕망이 교차적으로 집합하는 미디어스케이프를 다시 쓰는 과정 위에 놓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립, 생존의 양식      


엘리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은 전부 죽거나 날 버렸어요. 전부요. 아저씨만 빼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랑 있는게 더 안전하단 소리 하지 마요... 그러면 더 무서울 테니까요.

<The Last of US>(Naughty Dog, 2013)     


    게임 <The Last of US>는 좀비 발생 이후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좀비 발생 시기에 딸을 잃고 밀수꾼으로 살아가던 조엘(트로이 베커)은 민병대 파이어플라이의 의뢰로 면역자인 엘리(애슐리 존슨)를 미국 반대편으로 밀수하게 된다. 딸을 잃었던 기억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중년 남성과 태어나자마자 가까운 이들을 잃었던 엘리가 공통적으로 택한 삶의 방식인 고립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다. 황폐하게 갈라진 미국에서 조엘과 엘리가 선택한 고립은 생물학적, 사회적 위기에 대처하는 가장 안전한 방식의 생존양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자신의 일상이 파괴될 수 있다는 두려움 앞에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군인, 좀비, 강도들을 지나치며 기나긴 여정을 함께한 조엘과 엘리의 관계는 변화하게 된다. 이런 둘의 관계는 사계절을 지나는 여행을 통해 (유사)부녀의 관계로 발전한다. 자연스럽게 면역자의 밀수라는 원래의 목적은 여행이 지속될수록 점차 다른 형태를 띄게 된다.


조엘 우린 굳이 이럴 필요 없어. 알고 있지?

엘리 다른 방법이 뭐가 있죠?

조엘 토미네 집으로 돌아가자. 그냥... 이 짓거리를 관두는 거야.

엘리 같이 이렇게 고생했잖아요. 지금껏 이렇게 고생했는데 헛되게 끝낼 순 없어요.

<The Last Of US>(Naughty Dog, 2013)     


    조엘과 엘리 사이의 유대감은 모든게 것이 고립된 세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여행의 말미에서 조엘은 엘리에게 다시 돌아가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살기를 제안한다. 이 장면 후 도착한 민병대의 거점에서 엘리의 위험에 대해 조엘이 취한 행동보면 이러한 유대감은 더욱 명확해진다. 엘리가 백신 연구를 위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엘은 살인을 불사하며 엘리를 구해낸다.

세계의 회복이라는 거대서사를 포기한 이 시리즈는 플레이어가 조엘의 입장에서 긴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체험을 제공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딸의 죽음 이후 바깥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켰던 조엘의 입장에서 죽음과 약탈이 가득한 현실(언어로 이루어진 상징계)은 무의미한 공간에 다름아니다. 반면 엘리와 긴 시간을 걸쳐 구축한 내밀한 관계 속의 세계는 모든 것이 무너진 현실과 달리 조엘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솔직한 대답과도 같다.

  세계의 회복이라는 거대한 임무와 비교하자면 보잘 것 없이 작은 소녀인 엘리의 생존이 조엘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던 것처럼 보인다. 세계의 종말을 구원해낼 기회 앞에서 유일한 희망을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린 조엘의 선택은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아닌 나의 존재를 보증해주는 것이 둘 사이의 관계라는 점을 확정한다. 엔딩 이후의 후일담에서 조엘에게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고 말해”달라며 되묻는 엘리에게 조엘이 보증한 것은 사건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라고 볼 수 있다.

    <The Last of US>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우리’라는 대명사는 국가나 사회와 같은 공동체의 응집에서 생겨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작은 이야기들이 무한하게 확장하는 연쇄 속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감정은 폐쇄된 공동체로서의 ‘우리’다. 세계라는 거대한 개념에 대한 상상이 불가능한 시대에 세계를 우리의 개념으로 등치시키는 조엘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이  선택이 세계에 대한 리얼리티의 재구축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가지는 가상성이 현실과 닮아있다면 그것은 게임의 미디어적 특성이 체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사는 플레이어가 특정하게 구축된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축조된 양식에 가깝다. 조엘과 엘리가 팬데믹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선택한 고립은 현실의 플레이어와 감응하게 된다. 단순히 게임의 재미와 흥미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해가 아닌 감정을 공유하며 함께 호흡하는 경험이야말로 이 게임을 움직이게 만든다. 플레이어는 서사를 쌓아가며 조엘-엘리-플레이어로 구성된 감정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The Last of US>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 인간들이 관계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해가는 과정을 은유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재난은 세계의 재구축을 가능케 만든다. 조엘의 무모한 선택이 플레이어의 공감을 얻은 것은 좀비 팬데믹으로 인해 현실 시스템이 붕괴된 세계에서 어떻게 나를 인식할 것인지에 대한 유의미한 해답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엘과 엘리의 여행에 동참했던 플레이어들은 쌓여진 서사를 바탕으로 감응하게 된다. 이때 플레이어의 감응은 조엘과 엘리의 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세계 자체를 경유하게 된다. 이 경유를 통해 플레이어는 현실과 가상의 연결점을 찾게 된다. 즉 게임 속 망가진 세계가 현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고립의 감각에서 찾아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심우일과 송치혁의 논의는 재난물이 어떻게 세계를 재구축하는지에 대한 친절한 가이딩(Guiding)인 셈이다. 심우일은 「재난의 기억에 대응하는 몇 가지 방식」과 「한국 영화와 재난의 상상력」, 두 편의 글을 통해 한국 영화에 나타난 재난의 의미에 다가간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전세대에 걸쳐 있는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2010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재난,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은 영화사적으로나, 장르사적으로나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심우일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영화에서 재난은 기억을 경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 대한 레퀴엠으로써 재난영화를 돌아본 심우일의 글은 영화라는 미디어가 가지는 특성을 풀어내고 있다. 유토피아의 열망에서 헤테로토피아로의 발견으로 귀결되는 한국의 재난영화에 대한 심우일의 통찰은 코로나 시대에 다양한 장르로 분화되는 K-movie의 새로운 일면을 분석하고 있다.

    송치혁은 「접촉, 감염, 기억」을 통해 (TV)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문화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재난을 다루고 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전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K-드라마를 위시한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재난의 예감은 늘 상존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은 전세계를 아우르는 문화적 현상과 이에 대한 국지적인 감성으로 읽어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재난에 대한 대중적 수용이다. 특히 단절과 고립이라는 특정한 형태의 감정적 반응은 텍스트 너머의 현실을 해석하고 싶어하는 수용자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반응 자체는 대중예술 장르가 가지는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재난이라는 특수한 맥락을 경유해야만 재현되는 어떤 것이 있다. 이런 분석은 아즈마 히로키의 「우편적 불안들」에서 지적한 세카이계의 맥락을 일정부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오타쿠물의 분석에만 유용하다고 생각됐던 포스트모던 담론이 대중적인 콘텐츠 수용의 확장된 맥락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이 글은 재난물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보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재난물이 가지는 서사적 관습을 한국적 맥락에서 새롭게 이해하고자 시도하며 기억과 윤리의 문제가 그 뒤에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길 위의 사람들

     

    재난의 상상이 불러일으킨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우리는 근래의 대중문화 텍스트가 현실을 새롭게 굴절시키는 국면에 대한 개략적인 지도를 그려보았다. 재난물에 대한 독해를 흥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현상으로 연결시키려는 거대한 시도 앞에서 필자들이 느꼈던 암담함, 무력감,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기획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였지만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훨씬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각각 연구와 관심 분야가 달랐기에 재난을 연구서의 테마로 잡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세미나와 회의를 진행하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필자들은 재난에 대한 불온한 상상이 현실의 재난과 교차한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다. 최근의 코로나 관련 기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코로나가 불러일으킨 생물학적 위기는 얼마 되지 않아 사회적 위기로 발전했다. 경제활동은 물론 심리적인 안전과 사회적인 시스템의 붕괴는 나 자신을 격리시킨다고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재난이 불러일으킨 기이한 현실이 인간 없는 세계의 상상을 구체화시킨다는 점에서 코로나 팬데믹은 새로운 인문학적 해석이 요청한다. 이 책은 이 요청에 대해 작지만 의미있는 한 걸음을 떼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재난이 언제나 시대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끝낼 수 없다. 언택트의 시대, 뉴노멀의 시대에 들어선 한국은 코로나 이전부터 재난과 동행해왔다. 문제는 모두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재난이 휩쓴 일상은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사람들의 무의식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때문에 재난물을 소비하고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은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암묵적으로 합의된 특정한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사회적인 마음이 재난물을 소비하는 수용자들의 체계를 형성하고 수많은 의미들로 분화하는 과정에 대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이 나아가야할 방향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멸망의 위기를 간접체험하며 떠올리는 ‘어떤 기억’을 탐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일 것이다. 이 기억과 함께 밀려드는 채 언어화되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들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아왔던 사람들이라면 공통으로 느껴지는 것들이다. 문제는 개인들의 기억이 균일하지 않다는 데 있을 것이다. 같은 사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때로는 가족으로, 때로는 괴물로, 때로는 공간과 접촉의 형태로 각자의 기억은 다르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재난의 상상이 불러일으킨 감정들은 서로의 삶을 바꿔놓을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만 한다.                                   

    이 책의 2장과 3장은 재난과 가족의 관계를 다룬 박재연의 「좀비는 ‘가족’을 해칠 수 있을까? - <좀비딸>과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에 나타난 팬데믹과 가족」이며 구자준이 쓴 「웹툰 속 괴물들의 계보학」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2장과 3장은 웹툰이라는 하나의 미디어에서 상이하게 나타나는 재난을 새로운 키워드를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담아내고 있다. 스낵컬쳐에 해당하는 웹툰에서 한국의 수용자들이 느끼는 마음의 체계를 읽어내려 했던 박재연과 구자준의 시도는 한국의 만화가 웹을 횡적으로 연결시키는 콘텐츠로 성장해가는 현재를 짚어내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4장과 5장은 영상예술을 중심으로 공간과 접촉이란 키워드로 재난을 다룬 글들이다. 심우일의 「재난의 기억에 대응하는 몇 가지 방식」, 「한국 영화와 재난의 상상력」와 송치혁의 「접촉, 감염, 기억」은 영상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한국 문화 전반에 재현된 재난의 표상과 그 의미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극장의 탄생, TV의 보급, 웹의 확장은 영상예술의 영역을 급격하게 팽창시켰다. 이에 따라 영상예술이 재현하는 것들에 대한 분석 역시 달라져야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2010년대는 K-무비와 K-드라마의 시대였다. 다소 포괄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K-culture는 한국 문화가 전 세계로 전염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글로벌과 로컬의 경계가 무화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심우일과 송치혁의 분석은 공간과 접촉이라는 매개를 경유해 한국인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시도인 동시에 K-culture가 유튜브, 넷플릭스 등을 통해 전세계인의 마음과 조우하는 풍경을 포착하려는 시도라고 보여진다. 이때 재난이라는 키워드는 매우 중요한 맥락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 책은 재난이라는 불온한 상상의 기원을 탐색하는 과정이며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필자들이 생각하는 재난 형태의 의미는 달랐지만 개인적, 사회적, 생물학적 재난이 한국 현대사의 국면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음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재난의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기억을 위로하는 한편 대중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짚어내기 위한 실험에 가깝다. 연구 분야가 다른 만큼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많은 영감을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설익은 필자들의 섣부른 생각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로 담아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독자들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기만을 바랄뿐이다.  

    끝으로 코로나와 여러 재난을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께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때로는 공부를 한다는 것이, 글을 쓴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가지고 이 책을 펴낼 수 있었던 것은 현장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재난의 절망과 싸우는 많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3부작으로 기획된 일종의 재난의 사회학 시리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 책을 시작으로 더욱 다양한 인문학적 상상력이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우리의 논의가 결코 책상 위에서만 그치지 않기를,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전달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책을 시작해보려 한다.


이 글은 출판문화진흥원 주최로 진행된 2020년 길위의 인문학 중 <재난의 상상, 포스트 펜데믹의 사회학>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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