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o난감>(Netflix, 2024)
살인은 사회학적 사건이다. 죽음은 한 사람의 일생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적 관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인을 다루는 콘텐츠들은 죽음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를 다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o난감>은 우연히 연쇄살인에 휘말리는 인물들이 서로 얽히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원작 웹툰의 기본적인 설정과 서사를 각색해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이탕(최우식)이 반복되는 살인을 경험하면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관찰하는데 집중한다. 여기에 그를 세상이 필요로 하는 히어로라 부르는 사이드킥 노빈(김요한)의 등장과 함께 이탕을 쫓는 형사 난감(손석구), 그리고 또다른 살인자 송촌(이희준)이 얽히며 이탕은 살인이라는 필연적 세계에 자신을 던지면서 드라마는 서서히 서사를 진행시킨다.
<살인자o난감>은 이탕의 반복적인 살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다. 대신 그의 피해자들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인과적 관계를 담담하게 보여줄뿐이다. 법의 처벌을 교묘히 피해가는 악인들에 대한 이탕의 살인은 죄책감보다 쾌감에 가까운 희열을 전달하게 된다. 또한 비현실적인 요소들의 겹침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증거인멸 역시 이탕의 살인에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살인의 연쇄에 대해 핍진성을 부여한다. 때문에 시청자들은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사적정의를 실현하는 ‘즐거운 살인’(delightful murder)의 공범이 된다.
그러나 드라마는 역설적이게도 이탕이 히어로의 능력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가 연쇄살인범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만든다. 이탕의 육감에 의존한 살인은 우연에 의해서만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유효하지만 확신에 이를 수 없는 모순의 구조는 잔혹한 살인이 반복될수록 증폭되기만 할뿐이다. 돌이켜보면 이탕의 정의가 실현되는 공간은 언제나 쓰레기장, 재개발촌, 야산, 저수지 등 고립되고 버려진 장소들이었다. 정의와 살인이 동의어가 되는 장소들이 이탕의 일상을 끊임없이 침범하는 카메라의 연출은 언젠가 이 모순의 구조가 곧 이탕 자신에게도 이를 것이라는 묵시와도 같다. 종국에 이르러 이루어지는 이탕과 난감, 송촌의 삼자대면은 모두가 정의라 믿었던 살인이 주는 즐거움 이면의 기괴함을 기어코 화면 위로 끄집어낸다.
넷플릭스 시대의 드라마는 극장과 TV ‘사이’의 공간을 점유하는 새로운 콘텐츠로서 자신의 생명력을 지속시켜왔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살인과 섹스가 넘쳐나는 종말의 풍경들은 드라마가 콘텐츠로서 살아남기 위해 치뤄야만하는 생존투쟁에 가까울 것이다. 결국 <살인자o난감>이 보여준 살인에 대한 적나라한 관찰은 지금 스크린과 TV에서는 불가능한 이후의 시대를 보여주는 콘텐츠 사회학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 시대의 드라마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살인자o난감>이 보여준 즐거움과 기괴함의 동거는 수많은 응답 중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