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2

피드백: 타락에 관하여

by 닭갈비

월요일 새벽 45인승 무정차 버스에 같이 탔던 선배 M에게 며칠 전 피드백이 왔다. 그 글이 올라간 직후 선배는 그때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피드백은 커피나 소화에 대한 것이 아닌 기억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근데 커피 관련 기억이 유독 더 잘 나는 거야? 마치 어제일처럼 글을 써


사실 나도 궁금하긴 했다. 올리고 있는 글의 일부는 꽤 긴 시간 다듬었던 글이다. 여기저기 남아있는 개인 자료와 기억을 더듬어 큰 줄기를 썼다. 큰 줄기가 완성되면 단락이나 문장의 순서를 바꿨고, 상대적으로 비거나 넘치는 부분을 채우고 덜어냈다. 글은 대개 더 또렷해지는 쪽으로 다듬게 되는데, 거기에 정신을 팔다 보면 어느 순간 적어놓은 글과 기억이 (때로는 조금 심각하게) 충돌하는 일이 생긴다. 근래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Y 앞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던 일을 적은 글이었다.

나는 공포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안 봤다는 그 영화의 어떤 장면이 계속 생각난다. 그 시절에 얽힌 개인 자료는 부모님 집에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아서 영화표를 모아둔 봉투를 보름 전에 뒤져봤다. 두둥. 20년도 넘은 날짜가 찍힌 그 영화의 관람권이 있다. 세상에.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웠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번엔 가계부를 펼쳐봤다. 그 카페에서 썼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비싼 커피 두 잔 가격에 해당하는 돈이 (여름방학이 아닌) 5월 중순에 '커피'로 나갔고, 공포 영화를 본 (여름방학의 어느) 날 내가 영화값에 쓴 돈 역시 티켓 두 장 값 정도 된다.

큰 줄기를 쓸 때 머릿속에 들어있는 희미한 기억은 두어 번 더듬었을 뿐이다. 열 번 더듬었다고 희미했던 기억이 열 배 또렷해졌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것을 문자로 바꿔 적은 글은 수차례, 때로는 십수 차례 읽고 고쳤다. 물론 애써 뭔가를 지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여러 차례 읽고 고칠수록 글은 더 매끄러워졌다. 그러는 사이 나는 거친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매끈한 글 쪽에 더 달라붙게 되었다. 팩트에서 멀어진 나는 타락했는가.


S는 귤과 똥을 언급했는가. 그렇다.

나는 그걸 커피와 똥으로 되받았는가. 그렇다. 심지어 반응이 좋았다.

월요일 새벽 버스가 섰는가. 그렇다. 서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

그렇다면 선배는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 자신이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손톱밑에 가시가 들보처럼 느껴지듯, 남의 대장에 누적된 변은 나의 대장을 자극하지 못한다. 자고로 인간은 그렇게 고독한 존재다.

H가 비운 컵커피는 무릎 높이까지 올라왔는가. 그렇다.

D는 토했는가. 그렇다. 목격자가 셋이다.

공포영화를 봤는가. ......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왜 보지 않았다고 썼는가. ......

나는 타락했는가. ...... 그렇지 않다. 변기 위에서 커피 향을 맡던 것이, D가 초벌로 닦고 나간 바닥을 물걸레질하며 손을 더럽혔던 것이 타락이라면 나는 매우 타락했지만, 공포영화를 보고도 보지 않았다고 쓴 것이 타락인 것 같지는 않다.


밤의 테라스에서 우리는 병입 된 공산품을 마시기도 한다. 단체손님이 왔다 갔나.


작가의 이전글자존감이 낮아질 때가 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