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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킨좀비 Sep 14. 2024

마술사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 1

edited by 비끗

“이번 무대는 오늘의 경연을 위해 가장 멀리에서 온 참가자의 공연입니다. 고난도의 손기술을 활용한 CD 마술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큰 박수로 모시겠습니다!”      


핀 조명이 켜지고 흥겨운 음악이 시작되었다. 백팩을 둘러맨 앳된 얼굴의 아마추어 마술사가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며 무대 가운데로 입장했다. 관객석을 한 바퀴 쭉 둘러본 후 짧게 심호흡을 하고 백팩을 벗어 의자 위에 올려두었다. 백팩에서 CD 한 장을 꺼내 손가락에 끼운 그가 흐르는 음악에 맞춰 천천히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다시 왼손으로 CD를 옮겼다. 점점 속도가 붙은 CD는 어느새 두 장으로 늘어나더니, 다시 네 장으로, 다시 여덟 장으로 늘어났다. 여덟 장의 CD를 마치 공작새의 깃털처럼 여러 가지 문양으로 펼쳐 보이자 관객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분명 흰색이었던 CD는 눈 깜짝할 사이 빨간색, 파란색으로 색깔이 바뀌기도 하고, 때로 빈손 너머로 아예 사라졌다가 허공 어디에선가 갑자기 튀어나오곤 했다. 관객들은 두 눈을 비비거나 목을 무대 쪽으로 쭉 내밀어 마술사의 비밀 기술을 캐내려고 애쓰다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연이어 펼쳐지자 고개를 내저으며 경의의 박수를 보냈다. 놀라움과 감탄이 섞인 탄성 앞에서 마술사는 관객과의 줄다리기에서 자신이 우위에 올라섰음을 직감했다. 관객들이 마술에 몰입할수록 점점 마술사에게 끌려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사실 마술사는 알고 있었다. 마술의 신비는 마술사의 어떤 신묘한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자기 확신이 무너지는 지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마술사는, 단지 사람들이 자신이 본 것을 전제로 현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전부로 믿어버리는 힘을 역이용하여 보이지 않는 틈에서 작은 기술을 사용할 뿐이었다. 관객들은 마술사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이 틀림없다는 그 믿음에 스스로 속아 넘어갔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과 그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혼란을 신비로움으로 인식했다. 자기를 믿을수록 마술의 함정에 걸려들게 되고, 종래에는 내가 본 것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다다라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마술사에게 찬탄의 박수를 보냈다.     


마술사는 되뇌었다. 이제 연습한 대로만 기술을 펼쳐 보인다면 관객들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마술적 상황에 잔뜩 매료된 만큼 많은 관객이 자신에게 투표를 해줄 것이라고. 이제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 수없이 연습했던 시간과 나 자신을 믿고 침착하게, 늘 하던 것처럼만 하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유를 찾은 마술사가 옅은 미소를 띤 바로 그때, 내가 그의 작은 개구리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순간, 그가 의자 위에 얌전히 올려둔 백팩이 저 혼자 스르륵 미끄러졌다. 마술사는 가방을 건드린 적이 없었고 무대에 아무런 흔들림이나 충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백팩은 마치 때에 맞춰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야 하는 배우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그 시점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팩이 넘어지면서 열린 지퍼 틈 사이로 안에 들어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무대 위로 쏟아졌다. 그는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동물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순간 관객들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객석으로부터 터져 나온 반응이 다른 의미의 놀라움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마침내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쫓아 등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번에는 그의 손가락에 걸려있던 CD 한 장이 손날을 타고 미끄러졌다. 조금 전까지 매끄럽게 그의 두 손을 오가던 CD가 이번에는 매끈하게 바닥을 굴러 무대를 지나 관객석 한 편의 어둠 어딘가로 사라졌다.      


마술사의 손 너머로 CD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자, 이제 관객들은 진짜 자기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마술사 역할과 관객 역할에 충실히 임하며 속이는 사람과 속는 사람의 액션-리액션이 이루어지던 연극이 끝나고 모두가 당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개구리의 마법이 시작된 것이다. 방금 전까지 관객들을 뒤흔들었던 마술사 역시 이제 속이는 자가 아닌 당하는 자의 자리로 옮겨졌다. 시간은 녹은 껌처럼 길고 끈적하게 늘어났다. 마술사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동시에 일시 정지되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식과 그런데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답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모든 움직임이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발버둥이 되었다. 이 무중력과도 같은 상태에서 자기 시간의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그의 개구리뿐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인간들 사이를 지나 장내를 쓱 한 번 훑어보고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커튼 뒤로 사라져 버리는 개구리.

삶이 미끄러지는 순간은 늘 이렇게 찾아왔다. 난데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생각해 본 적 없는 방향과 예상하지 못했던 포즈로 팔짝팔짝 뛰어오르다가 내가 간절하게 세워놓은 수고로운 탑을 살짝 건드리고는 유유히 사라져 버리는 개구리처럼.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작은 개구리를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이 있고 오늘은 마술사의 차례였다.        


마술사는 비록 아직 아마추어였지만 마술이라는 장르의 연약함을 사랑했다. 아주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는 마술 공연 특유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좋았다. 마술이 잘 이루어질 때 관객들을 쥐고 흔들며 사람들을 주도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그보다 마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벌어질 수 있는 수많은 실수와 실패의 가능성을 스스로 이겨내고 온전히 마술을 선보였을 때의 그 성공감만큼 그를 충만하게 하는 것은 없었다. 때문에 그 완성의 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또한 완성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허다하고 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이번에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상황이 아니었지만, 때로는 무언지 모르고 입에 넣은 음식이 아무리 쓰고 짜도 삼켜야 하는 순간에는 삼켜야만 했다.     

 

넘어진 백팩과 사라진 CD 사이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곧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들고 있던 나머지 CD들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패잔병처럼 쓰러져있던 백팩을 일으켜 세우고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넣었다. 그는 상황을 빨리 수습했다. 아직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핀 조명이 다시 주인공을 비췄다. 그는 의연하게 CD를 손가락에 끼웠고 다시 리듬에 올라탔다. 관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까보다 더 큰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곧 다시 공연을 멈춰야만 했다.


(2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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