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ed by 초조
초조는 물어보지 않는다. 처음 가 본 카페의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몰라도, 간 수치가 상이한 두 개의 건강검진 결과표를 받아도 물어보지 않는다. 물어보는 대신에 초조는 핸드폰으로 블로그 리뷰글을 찾아보며 그 카페의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아냈고, 늘 자신의 간이 정상이거나 비정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네 번째로 들어간 직장에서 급여를 묻지 않고 일을 시작한 것은 심하지 않았느냐고, 친구가 물었고, 초조는 급여에 대해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한 달이나 있을 수 있었다고 킥킥거렸다.
친구는 그날 하루 초조를 지켜본다. 초조가 자신에게 선물 받은 키링의 캐릭터명을 알아내기 위해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하는 것을 지켜본다. 어제까지 자료를 보내기로 한 후배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먼저 연락해서 물어보지 않는 것을 지켜본다. 갑자기 웃음이 터진 자신을 초조가 멀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는 것을 지켜본다. 한나절이 지났을 무렵 친구가 결론을 내렸다.
“너, 물어보면 죽는 병에 걸린 거야. 그렇지?”
글쎄요, 네-라고 답해야 할까요? 그치만 물어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은 것뿐인데 조금 억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물어보는 것들의 대부분은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거나, 관련된 책을 찾아보거나, 혹은 직접 관찰하거나 추론함으로써 답을 얻을 수 있지요(알잘딱이라고도 하지요).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간편하게 알아낼 수 있다는 장점은 있겠지만 물음을 던지는 행위는 공을 던지는 행위와 닮아 있거든요. 내가 던진 공을 상대가 잘 받아준다면 즐거운 캐치볼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공을 허망하게 바라보거나, 공을 잡으러 상대가 달려가는 동안 미안함과 쓸쓸함을 견디며 서 있어야 합니다. 또, 잘못 던진 공은 유리창을 깨기도 하지요. 그런 리스크를 안고 물어보는 것보다는 스스로 알아내는 게 퍽 안전한 선택이 아닐까요?*
(*잠깐. 설의법은 질문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수사적 의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물음표를 썼어도 뭔가를 물어보고 있지는 않은 셈입니다.)
~ 물어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소소한 TIP ~
1. 지금 우리 동네에 비가 오는지 궁금하다면, 혹은 동네 사거리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야채곱창 트럭이 오늘 나왔는지 궁금하다면, 인터넷에 접속해 도시교통정보센터 사이트에 들어가십시오. 그곳에서 전국 도로에 설치된 실시간 CCTV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지역란에 동네 이름을 입력하고, 지도에 뜬 CCTV를 선택해서 거리를 들여다보면 우산을 쓴 사람들이 돌아다니는지, 길가에 푸드트럭이 세워져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어느 상가에 있는 카페에 갔는데 화장실 비밀번호가 보이지 않는다면, 우선은 인터넷으로 해당 카페명과 화장실 비밀번호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십시오.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카페 옆에 있는 다른 가게들의 안쪽을 살펴봅시다. 벽이나 출입문 옆쪽에 높은 확률로 화장실 비밀번호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못 찾겠다면 옆 건물로 가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십시오.
3. 어떤 가게의 영업시간이 인터넷에 나와있지 않다면 지도앱의 거리뷰로 가게 외관을 확인하십시오. 거리뷰에서 가게 외관을 확대해 보면 문 옆에 영업시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4. 친구가 사 온 케이크가 어디 제품인지 궁금하면 사진을 찍어서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하십시오. 케이크가 아니라 다른 제품들도 적용 가능합니다.
자신이 공 던지기에 일가견이 있어 자신만만한 경우라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물어보는 것은 상대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일입니다. 내 질문으로 이루어진 비트에 맞춰 즉흥 랩을 내뱉게 만드는 것이죠. 또, 물어보는 것은 걸어가고 있던 상대를 낚아채 왈츠를 추는 일. 상대가 속해 있던 맥락을 끊어내고 내 맥락 안으로 끌어들여 상대의 자유를 일시적으로 박탈합니다. 그리고 물어보는 것은 내 무지에 대한 책임을 상대가 지게 하는 일이며, 지구상에 둘 이상의 사람을 하나의 화두에 몰입시키는 일이지요. 그러니 물어보는 것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타인을 배제하더라도, 물어보는 것은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든 상자를 열어보는 일이라는 점에서 지양될 필요가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살아 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 고양이의 상태는 하나로 결정됩니다. 물어본다는 것은 바로 상자를 열어 무언가의 정체를 하나로 결정하는 행위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의 정체가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는 가능성의 상태를 깨버리고, 아무런 기대감도 실망감도 없는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반면,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의 정체를 유예시킴으로써 가능성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고, 그 가능성의 영역에 기대어 잠시라도 기분 좋은 상상에 머무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령, 썸을 타고 있는 상대에게 고백하지 않고, 미지의 불안감과 긴장감 속에서 두근거림을 간직하는 것처럼요. 또, 상자 속에 든 고양이를 죽이지 않고 계속 살려둘 수 있는 것처럼요.
어쩌면 물어보지 않는 것은 병이 아니라 미덕인 셈입니다.
사실은 물어보는 게 조금 무섭다고, 초조가 친구에게 말한다.
“가령, ‘혹시 화장실은 어디에 있나요?’라는 물음을 던졌다고 생각해 봐. 열에 아홉, 아니, 백에 아흔아홉은 화장실 위치에 대한 답을 듣게 될 거야. 그런데 어딘지 불운하고 상황을 뒤집어쓰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들은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라는 답을 듣게 된단 말이야.”
그건 그렇게 답하는 사람이 문제 있는 것 아니냐고, 친구가 반문한다. 초조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누구든 하루에 화장실 위치만 아흔아홉 번 답변해주다 보면 백 번째에는 폭발하겠지. 아마 그 사람은 그날 아흔아홉 번 친절했을걸. 불운하게도 내가 그 백 번째가 된 것일 뿐.”
초조는 자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불운을 달고 산다는 것은 여상한 물음조차도 러시안룰렛의 방아쇠를 당기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뜻이지.”
친구는 그러니 물어보지 않는 거라고 말하는 초조의 표정이 불안하면서도 편안해 보이고, 초조해하면서도 느긋해 보여서 킥킥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