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ed by 비끗
안녕하세요? 개구리입니다.
오늘은 숙주를 제치고 제가 전면에 나서 관계의 미끄러짐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숙주가 제 탓으로 돌리곤 하는 그의 개인적인 미끄러운 일상에 대해서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숙주의 주변을 팔짝팔짝 뛰어다닐 뿐 그게 자신을 미끄러트린다고 주장하는 건 그의 생각일 뿐이니까요. 그게 그의 일상을 망치거나 혹은 흥미롭게 한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의 해석일 뿐이니까요.
다만 저는 인간들이 시라고 부르는 형식으로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글의 형식이 뭔가 이걸 말하는 건가 싶으면 아닌 것 같고, 저걸 말하는 거구나 싶으면 맞는 것도 같다는 점에서, 언어가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어떤 방향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간다는 점에서 저의 추구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라니 낯설고 불편하다구요? 익숙하고 편안하게 미끄러져 본 적 있으십니까? 만약 그런 적이 있으시다면 지금 당장 뒤로가기를 누르고 구독을 취소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이라는 제목을 보고 호기심을 느껴 이 페이지에 접속한 당신은 분명 자기 안의 싱크홀에 빠져 낯설고 불편하게 허우적거려본 적이 있을 겁니다. 자기 안의 어둠을 믿고, 함부로 커튼을 열어젖히기보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또 눈을 감아 가장 깊은 어둠을 만들어보십시오. 그 암흑 속에서 보랏빛 불꽃이 피어오를 때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흘러온 어떤 장면, 어떤 소리, 어떤 생각들에 집중하면서 시를 읽어보십시오. 제 멋대로 말입니다.
싱크홀
모래알이 사라질까 봐 두렵니
네가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지키고 있는 뼈 말이야
젖은 망토를 쓰고 숲을 걸어가는 아이야
네 불은 아직 잘 타고 있어
어둠 다음엔 무엇이 있는지 아니
밤하늘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을 누가 아름답다고 말해주었니
너는 그걸 믿니
믿고 싶으니
우리가 우리 앞에 배를 띄우는 시간 동안
너와 나는 숨을 참기로 하자
호흡을 멈추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고 어떻고 죽고 어떻게 디디고 어떻게 미끄러지는지
흔들리는 질문의 꼬리에 매 맞지 말고
후, 서로 불어 끄지도 말고
사나운 늑대를 작은 강아지처럼 끌어안듯이
열어보지 말자 약속한 우리의 작은 상자를 흔들어보지 않듯이
눈 감은 사람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가장 긴 숫자를 헤아리듯이
힘껏 뛰어올라도 곧 떨어져 내릴 것을 알지만
나의 손가락을 깨물어 너의 입술에 넣어주면서
뒤를 돌아보면 그다음엔
올라가야 할지 내려가야 할지 그전엔
어떤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는지 나중엔
기억하는 것보다 잊은 게 더 많을 이 숲속에서
컵이 뒤집힐까 봐 무섭니
거꾸로 적힌 글자들도 때로 악몽을 꾼단다
어렵게 빚은 어깨가 녹아 사라질까 봐 아직 망토를 벗지 못하는 아이야
내 촛불도 아직 잘 타고 있어
우리는 계속 발꿈치를 쳐다보겠지만
그럼에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면 영화를 하나 추천하겠습니다.
그 영화의 이름은 <메기>. 구교환, 이주영이 출연하고 이옥섭이 연출한 그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것이다”
저는 한 마리 개구리일 뿐 영화 추천으로 브런치 조회수를 높일 꿍꿍이 따위 없습니다. 그냥 영화를 보았고 영화 속 관계의 미끄러짐에 대해 시로 이야기를 더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함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지은 우리의 집에서 어느 날 손가락으로 저 벽돌 하나를 밀어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 때, 벽돌은 밀리고 벽은 허물어지고 집은 무너집니다. 내가 하나를 쌓고 네가 하나를 쌓는 순서 속에서 우리는 정연하지만 네가 하나를 쌓은 게 맞는지 혹은 내가 하나를 안 쌓지는 않았는지 가늘게 되새겨본다면 그건 스스로 자초한 미끄러짐과는 또 다른 우리의 미끄러짐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끄러짐에 미끄러짐을 거듭하며 구덩이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붙잡아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시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이 설명도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구요? 저를 탓하지 마십시오. 그건 당신이 여전히 절대 무너지지 않고 중심을 잡고 살겠다고 몸에 너무 힘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움직임은 춤이 아니라 미끄러짐이 되는 겁니다.
대신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세상은 갑자기 나타난 구덩이 천지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상대를 가늘게 쳐다보며 그 뒷면까지를 마음대로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덩이에 빠지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쉽기를 포기하십시오.
이제 그만 이 글 읽기를 포기하시겠다구요? 어차피 글은 이제 마무리됩니다. 다만 혹시라도 잠들 기 전 생각나는 얼굴이나 한참이 지나 뒤늦게 코드를 이해하고 웃음이 터진 유머처럼 언젠가 무방비 상태에서 이 글이 두둥실 떠오른다면. 그렇다면 우선 모두가 잠든 밤 홀로 저 영화를 보시고, 달빛 아래에서 좋아하는 음악에 맞춰 두 곡 정도 춤을 춘 다음, 다시 저 시와 이 글을 읽어보십시오. 그날 다시 제가 당신의 꿈으로 찾아가겠습니다.
- 누군가의 혹은 어쩌면 당신의 개구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