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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킨좀비 Aug 24. 2024

천칭과 시소2: 죽음의 이지선다는 쾌락을 부른다

edited by 초조

( 1편에 이어서)


울렁거림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그게 천칭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면 조금쯤 기꺼운 데가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고 때로는 혼돈으로 빚어진 반죽 같기도 합니다. 때문에 절대 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천칭이 있다면 상대 우위를 확인함으로써 나름의 질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천칭으로 인한 울렁거림은 나 자신이 질서를 찾아가는 중이라는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입니다. 놓이다 못해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이 즐거워지기까지 합니다.

스스로의 몸으로 천칭이면서 보이지 않는 관념의 천칭과도 연결되어 있고, 세계를 배회하다 마주한 사물이나 사건을 천칭에 달아보던 저라는 존재는 어느새 천칭 위에 올라타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시소’의 탄생입니다.


시소는 놀이기구입니다. 로제 카이와가 언급한 놀이의 4대 요소 중에는 일링크스가 있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 느낄 수 있는 신체의 감각이 뒤집히고 뒤흔들리는 느낌, 그로 인한 현기증을 즐기는 놀이를 일링크스라고 하지요. 시소가 주는 즐거움도 일링크스에 해당합니다. 불시에 엉덩이를 얻어맞아 튀어 올랐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털썩 내려앉는, 신체의 감각을 혼란시키며 쾌감을 얻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시소가 수평을 유지하는 것을 본 적 있으십니까? 적어도 제 기억에 시소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을 때에도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천칭과는 달리 말이지요. 천칭은 수평을 기본으로 삼는 도구인데 반해, 시소는 양쪽에 같은 무게를 싣고도 기울어져버리는 기구입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에 특화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어쨌든.


다시 한번 ‘고기를 싫어하는 팀장님’과 ‘생선을 싫어하는 사수 선배’와 아무래도 좋은 저, 이렇게 셋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고 상상해 봅시다. 함께 간 백반집에는 ‘고등어정식’과 ‘제육정식’이 있고 모든 메뉴는 2인분 이상 주문이 가능합니다. 그들이 저에게 메뉴를 고르라고 할 때 저는 식사 메뉴를 빙자한 그들과의 관계를 천칭에 올려놓고 저울질해 볼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천칭이 수평을 유지할 만한 묘수를 떠올립니다. 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고등어정식 2인분과 제육정식 2인분을 모두 주문하는 것이지요. 추가적인 금전 손실과 배부름을 감수해야겠지만 팀장님도 사수 선배도 만족할 만한 식사를 할 수 있을 테고, 저는 가까스로 그들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상황을 모면하기에는 괜찮은 판단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런 판단은 좀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런 난제에 대해 이런 미적지근한 판단을 내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꾀를 부려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아가려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런 얍삽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라는 걸 다른 두 사람에게 들키는 것이 껄끄럽기도 하고요. 둘 중 하나가 천칭 위에서 나동그라질 때까지 치열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야말로 결과에 승복할 수 있을 만한 승부가 아닐까요?


그러니 묘수는 접어두고 다시 팀장님을 위한 고등어정식 3인분과 사수 선배를 위한 제육정식 3인분 사이에서 양자택일에 몰두합니다. 주문을 받으러 점원이 걸어옵니다. 천칭은 더욱 맹렬하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고, 저는 흔들리는 머리통을 어깨 위에 간신히 올려놓은 듯한 울렁거림을 느낍니다. 오후에 옆자리에 앉은 사수 선배로부터 메신저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 장면이나, 아침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팀장님이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사수 선배가 이번엔 이직에 성공할 수 있을지, 팀장님은 이직 생각이 없으신지, 다 떠나서 나는 이 회사에 얼마나 있을 건지, 회사를 떠난 뒤에 나는 무엇을 할지, 미래로 미래로 향하던 생각은 종국에는 하얀빛에 가닿습니다. 마치 모든 게 끝난 뒤와도 같은 하얀빛 속에서, 동굴 같은 울림이 귓가에 퍼집니다.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이러고 있던가?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일 수가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사실 찰나의 유희에 불과하거늘…’

울렁거림 속에서 감각을 혼란시키는 쾌감이, 일링크스가 주는 도파민이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유희에 불과합니다. 그러자 이번엔, 팀장님과 사수 선배 중에 누구를 불쾌하게 만들어볼까, 누구와 척을 져야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길까, 그런 고민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은 더 이상 천칭의 고뇌가 아닌, 시소의 유희가 되어버립니다.


“주문하시겠어요?”


3쌍의 눈이 저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저는 그 중 점원의 눈을 마주하며 오늘이 며칠이냐고 묻습니다. 점원의 답을 듣고 저는 답합니다.


“23일은 홀수고, 고등어정식도 5글자로 홀수니까 고등어정식 3개 주세요.”


그리고 물 한 컵을 쭈욱 들이킵니다. 고된 유희 끝에 마시는 물은 얼마나 달던지요. 작게 숨을 몰아쉰 저는 옆에서 떠드는 두 사람을 비롯한 세상이 시시해져서 잠시 입을 다물고 쉬기로 합니다. 언제 또다시 천칭을, 아니, 시소를 타야 할 순간이 올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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