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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킨좀비 Sep 21. 2024

내 귀에 귀신이 살아요

edited by 초조

“토요일에 먹은 데로 가겠습니다.”


미팅 가는 차 안에서 직장 동료가 말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경기 남부였고, 차로 사십 분을 달려야 하는 곳이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30분.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빨리 출발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기에 제때 도착한다면 가볍게 끼니를 때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료의 토요일 행적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으므로 토요일에 뭘 먹었냐고 물었다. 동료는 ‘토요일에요?’라고 반문했다. 떨떠름한 어감이 묻어 나왔기에 덩달아 떨떠름해졌다.


“뭐더라, 햄버거 먹은 것 같은데요.”


빠르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메뉴 괜찮네요’라고 말했다. 잠깐 동안 차 안에는 불편한 정적이 맴돌았다. 동료는 재즈풍의 음악을, 어딘지 불협화음으로 들리는 조용한 노래를 작게 틀었고 나는 미팅 전에 보려고 했던 자료들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니라 미팅 장소 앞이었다. 뭘까, 햄버거 가게에 들렀다 가는 거 아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고 있던 자료를 갈무리하는 동안, 동료는 전화로 팀장에게 뭔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중 어떤 말이 귀에 선명히 걸려들었다.


“통행료 없는 데로 오느라 10분 더 걸렸네요.”


통행료 없는 데로… 토요일에 먹은 데로...

유사한 어감을 가진 말들을 번갈아 곱씹다가 깨달았다. 아, 나 또 말귀(鬼)에 홀렸었구나.


말-귀(말鬼)
발음 [말뀌]
명사 1. 말에 붙어살며 말을 미끄러지게 하는 귀신.




오늘은 어떤 귀(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귀(鬼)의 이름은 말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말에 붙어사는 귀신이지요. 이 귀(鬼)는 일상에서 종종 사용되는 ‘말귀를 못 알아듣네’의 ‘말귀’와는 동음이의어 관계에 있으며, 맥락적으로도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귀를 탓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총기가 부족함을 탓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말에 이상한 조화를 부리는 귀신을 탓하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이 귀(鬼)가 머물고 있는 곳은 우리 얼굴의 양쪽에 붙어 있는 귀(耳) 언저리입니다. 말귀는 그곳을 지키고 있다가 귀(耳)로 흘러 들어가는 말을 낚아채 장난질을 칩니다. 가령, 국숫집에 같이 간 일행이 ‘하, 더워요’라고 말하는 것을 ‘핫도그요’라고 듣는 것이나, 미팅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직장 동료가 ‘통행료 없는 데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토요일에 먹은 데로 가겠습니다’라고 듣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귀(耳) 언저리에 말귀가 붙어 있다는 증거지요. 말귀의 장난은 음운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하되, 연음이나 구개음화 같은 다양한 음운 현상을 활용합니다. 그래서 말의 원본을 듣고 말귀의 말과 비교해 보면 ‘그렇게 들을 수도 있겠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그게 남들보다 자주 반복되면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지요.


제가 언제부터 이 귀(鬼)를 달고 다닌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시끄러운 음악을 즐겨 들은 10대의 영향인 건지, 말보다는 글을 편하게 여기기 시작한 20대의 영향인 건지.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남들은 어쩌다 한 번 스치듯 만나는 이 귀(鬼)가 제 귀(耳) 근처에서 오랫동안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루에 네댓 번은 말귀의 장난에 걸려들고 말지요. 다른 귀(鬼)에 홀렸다면 일상이 대단히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귀의 장난은 작고 사소해서 해프닝 그 이상으로는 커지지 않는 듯했습니다. ‘마라톤 선수를 마라탕수육이라고 들었어요.’라고 실웃음을 짓고 지나갈 뿐인 해프닝. 때로는 웃음을 주곤 했기에 저는 말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나서도 한참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 작고 사소한 장난이 누적되어 하나의 실체가 되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말귀에 의해 교란된 말들은 대화를 미끄러뜨립니다. 생각해 보면 ‘마라톤 선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과 그걸 ‘마라탕수육’으로 듣는 사람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넌센스겠죠. 문제는 한 번 대화가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관계 역시 벌어지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개성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실의 한쪽 끝과 다른 한쪽 끝을 각각 부여잡고 더 멀어지지 않도록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류를 통해, 대부분의 경우 대화를 통해 그 실을 고쳐 잡게 되는데 대화가 자꾸 미끄러진다 싶으면 그 실을 놓아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아무리 말귀의 장난이 사소해 보여도, 그게 대화를 흔들고 더 나아가 관계를 흔든다면 묵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과 말 사이에 말귀의 말이 섞여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고, 말귀의 말을 듣더라도 그것을 공론화하지 않은 채로 은밀하게 묻어버리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귀 역시 귀(鬼)는 귀(鬼)인지라, 사람을 깜빡 홀려버리곤 합니다. 사람의 생김새를 하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귀신을 마주했을 때, 처음엔 이상한 것을 모르다가 나중에서야 ‘아, 방금 그거 사람 아니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귀의 말 역시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鬼)에 홀린 사람은 귀(鬼)를 따라 물속으로 허우적거리며 걸어 들어가고, 귀(鬼)의 말을 좇아 엉뚱한 말을 일삼게 되지요. 귀(鬼)에 홀렸었다는 걸 깨닫고 멈췄을 때에는 이미 귀(鬼)의 매개가 되어 세상에 균열을 만들어 낸 뒤입니다. 거래처 직원이 ‘마실 것 좀 드릴까요’라고 한 말을 ‘마스크 좀 드릴까요’로 들은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마침 코로나19 재유행 뉴스를 떠올린 저는 화들짝 놀라서 ‘챙겨 왔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것이고, 그 순간 저와 그 사람 사이에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균열이 생기고 말 것입니다. 애써 태연한 얼굴로 ‘마실 것’을 내온 그 직원을 보고 나서야 저는 ‘마실 것’을 ‘마스크’로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닫겠지만, 뒤늦게 뭐라 변명한다고 해도 이미 생겨난 균열이 메워질 리 없지요. 상대의 눈에 저는 어딘지 이상한 사람, 마실 것 하나에 지나치게 기겁하는, 이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어딘지 어긋나 있는 것만 같은 존재인 귀(鬼)처럼 느껴질 뿐일 테니까요.


모두가 일찌감치 피한 균열 앞에서 가장 마지막에 돌아 나오는 사람은 귀(鬼)에 홀렸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균열 앞에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면서, 결심합니다. 다시는 귀(鬼)에 홀리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경계심은 점점 커져만 가지만, 말귀는 그런 저를 비웃듯이 언제든 귀(耳)로 흘러들어 가는 말을 낚아 채 교묘하게 바꿔 놓습니다.


“말귀라니, 살면서 처음 들어봐.”
“설명서가 있어?”
“설명서 아니고 살면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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