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미 May 31. 2021

10. 동문 취재 일대기

갑자기 나보고 하라고요?

* 사진은 안동대신문 494호 9면 사진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기사는 9월호에 무사히 실렸다. 문화부에 소속돼 처음 쓴 문화기사가 지면으로 나온 걸 보니 뿌듯했다. 그 후 일주일 가량 쉬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학업과 아르바이트가 날 기다리고 있어 편히 쉬진 못했지만 신문사를 신경 쓰지 않았던 일주일은 너무 홀가분했다.


일주일 후 신문사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월요일은 가안 회의하는 날이다. 모든 구성원이 두 가지씩 가안을 생각해오고 이를 모두에게 말한 후 어떤 가안을 쓰는 게 좋을지 상의하는 시간이다. 그때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가안을 들고 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한글날'에 대한 가안을 생각해 갔던 것 같다.


1면부터 12면까지 어떤 기사가 들어가야 할지 구상하다가 '한글날'로 한 면을 채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 가안의 주인공이었던 나는 당시 동문 인터뷰에 참여하고 있으니 다른 기사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의미로 부장님과 공동취재를 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지금까지 동문 기사는 국장님이 써왔다. 나는 그저 취재 전 사전 취재를 돕고 인터뷰 질문을 준비하는 정도로만 참여해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틀 삼일이 지났을 무렵 취재하는 게 귀찮아 신문사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나에게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시간이 안된단 말씀이신 거죠? 네, 그럼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국장, 또 안 된대? 그냥 그 사람 하지 마."

"그럼 누굴 해야 합니까."


아무래도 동문 인터뷰를 거절당한 것 같았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저번 학기 학과 MT에서 같은 조가 됐던 선배. 당시에는 몰랐지만 동기들이 말해줘서 알게 됐던 그 선배의 직업. 그 선배의 직업은 바로 엉덩국을 그린 만화작가였다. 같은 조였기에 카톡은 친구가 돼 있어 동기들이 사인받고 싶어 하면 스리슬쩍 연락해 받을 수 있도록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슬쩍 말해봤다.


"저, 아직 학교에 재학 중인 사람이라도 괜찮나요?"

"누군데."

"그, 엉덩국 그리신 작가님인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국장님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 너희 과에 엉덩국 있지? 우리가 17년도에도 그 사람 인터뷰하려고 이곳저곳에 다 연락했는데 못 찾았던! 혹시 엉덩국 알아? 친해? 연락처 있어?"

"연락처는 모르고 카톡이 있긴 한ㄷ..."

"그럼 바로 연락해 봐."


이렇게까지 큰 리액션이 나올지 몰랐던 나는 얼떨결에 알겠다고 하곤 카톡을 열었다. 그런데 막상 연락하려고 하니 망설여졌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 선배가 카톡을 잘 읽는 스타일도 아니었기에 연락했다가 기분 나빠하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국장님의 재촉에 못 이겨 연락을 드렸고 역시나 한참을 보시지 않다가 14시간 후에 답장이 왔다. 일단 알겠다고.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국장님에게 알려드렸고 뿌듯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후 나는 한글날 기사를 쓰면서 동문 취재까지 같이 했다. 한글날 기사를 위한 인터뷰도 진행하고 동문과 인터뷰 날짜, 시간, 장소 등도 정했다. 한글날 기사는 원래 쓰던 대로 착착 진행해 나갔지만 동문 인터뷰 질문지는 왠지 잘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안 보던 만화까지 봤다. 그리고 주변에 엉덩국 만화 팬이라는 지인들에게도 만약 그 사람을 만난다면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완성된 질문지는 국장님에게 보여드리고 선배에게도 보내드렸다.


인터뷰 당일. 그전에 동문 취재를 갔던 것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국장님과 함께 인터뷰 장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국장님이 충격적인 말을 하셨다.


"근데 이번엔 네가 동문 구했으니 네가 질문하고 기사 써야 하는 거 알지?"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일 뿐인데. 난 아직 머리는 있지만 사용할 줄 모르는 깡통일 뿐인데 갑자기 동문 취재를 혼자서 맡으라니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당차게 인터뷰 장소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나는 인터뷰를 진행하고 국장님은 사진을 찍으셨다. 아무래도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닌 얼굴 정도는 아는 선배였기에 나름 편안한 분위기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답변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걸 기사로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질문지에 없던 사회적 이슈 문제나 조금 더 심오한 문제에 관해 질문을 하면 대답을 잘 못해주셨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예상 질문에 없던 질문이기에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그렇게 혼란의 인터뷰가 끝나고 신문사에 다시 들어오니 저절로 한숨이 푹 쉬어졌다.


일단 기사는 많아봐야 원고지 15~17매 정도 분량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인터뷰 기사의 경우 한 면을 모두 채워야 하기에 적어도 원고지 25매는 써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메모한 걸 분석해보고 녹음한 걸 들어봐도 그 정도 내용이 나올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써보자는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녹음본을 그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글은 나중에 다듬을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모한 짓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을 신문사에서 보냈다. 항상 막차를 놓치기에 아침 첫 차를 타고 가서 씻고 바로 나오는 날이 반복됐다. 그렇게 내용 정리는 다 했는데 이젠 리드 문단이 말썽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나오지 않는 리드 문단. 예전에 썼던 동문 기사를 아무리 읽어봐도 뭘 어떻게 적어야 할 진 너무 막막해 결국 그 방법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일명 '던지기'.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차피 내 실력은 여기까지이니 국장님이 알아서 퇴고해 주세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게 동문 기사를 던졌고 국장님은 한숨을 푹 쉬더니 내 건 가장 나중에 본다고 하신다. 미안하긴 했지만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던 국장님이라 살짝 고생 좀 해보라는 심산으로 던진 것도 있기에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번의 퇴고 과정을 거치며 완성된 동문 인터뷰 기사는 드디어 편집지에 들어갔고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그다음부터였다. 총괄국장이 편집지를 보다가 편집국장에게 왜 동문 기사를 부장도 아니고 1년 차 정기자에게 맡기냐고, 내용은 이게 뭐냐고 막 따져 묻기 시작했다. 그러자 편집국장은 그 1년 차 정기자가 어렵게 섭외한 동문이니 당연히 그 애가 하는 게 맞는 거고, 내가 인터뷰에 따라갔었는데 대답을 그렇게밖에 안 할 걸 뭐 어떻게 하냐고 더 화를 냈다. 그렇게 언쟁이 있고 난 후 총괄국장이 나를 따로 불렀다. 이미 내가 밖에 들었던 얘기를 조금 순화해서 그대로 나한테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자기도 안다고, 어떤 상황인지 들어서 아는데 그 속에 있는 내면을 끄집어낼 스킬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말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혼자 가서 이런 내용만을 가져왔으면 이런 소리를 들어도 충분하나 편집국장님과 함께 갔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온 걸 나보고 뭐 어쩌란 말인가.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고 분노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났으나 참았다. 화를 내봤자 나만 손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어쨌든 기사는 원래 형식대로 작성된 원문과 궁금하지만 물어보진 못했던 질문을 모은 'Q&A상자'를 따로 만들어 지면에 예쁘게 실리게 됐다. 그렇게 이 기사는 내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기사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미 기성언론에서 일을 하고 있고 전년도 편집국장을 맡으셨던 분의 이 말을 듣고 최고의 기사가 됐다.



와, 정말 잘했다. 나도 다양한 측면에서 동문의 이야기를 담아보려고 했는데.
 따로 박스 만들어서 가벼운 질문한 거 너무 좋다. 잘했어.



근데 웃긴 건 뭔지 아는가? 날 배려해서 부장님과 함께 썼던 그 한글날 기사. 내가 부장님이 쓴 기사의 두 배 이상을 썼다는 것이다. 나도 참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09. 첫 기획 마지막 취재 일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