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고 무비>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개성을 요구하기도 하고 평범함을 강요하기도 한다. '개성'이 없으면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사람인 것 마냥 코웃음을 치면서도 누군가가 유난히 '개성'이 넘치면 후드려패 똑같은 모양으로 만든다. 에밋은 개성이 없는 하얀 백지같은 존재다. 너무 흔하고 평범하며 설명서에 따라 사는 레고다. 모두에게 투명레고 취급을 받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누구나 고민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너무 평범한가?' '난 특별하지 않나?' 나는 특히 미대를 다니면서 20대 내내 그런 고민을 했더랬다. 마스터 빌더같이 뭐든 척척 창조해내고 듣도 보도 못한 음악과 미술을 즐기고 개성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쭈굴거렸다. 때문에 유난히 에밋에게 공감하게 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얼굴, 특별할 것 없는 취향, 특별할 것 없는 일상.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마냥 평범하게 행복하기는 쉽지 않다.
에밋은 비트루비우스의 예언에 따라 '스페셜'이 된다. 에밋에게 있어서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특별하다'는 말. 누군가가 '넌 특별해'라고 믿어줄 때, 사람(레고)의 삶은 바뀐다. 사실 개성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너무나 평범한 에밋을 보자. 그러나 정말 그는 평범한가? 그는 아침마다 밝게 인사하고 항상 웃고 상대방을 칭찬하고 이웃의 이름과 반려동물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세심함을 가졌으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즐긴다. 그는 눈에 띄지 않을 뿐, 매우 선하고 긍정적이며 용기있다.
'개성'이라는 말은 오독되고 오용되는 경향이 있다. '개성'은 '색깔'이다. 화려한 무지개 옆에 서 있다고 해서 내가 '색깔'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나만의 색이 분명히 있으니까. 모두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특별하다. 에밋에게는 에밋의 색깔이 있다. 단지 그는 그것이 특별하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비트루비우스가 예언을 지어냈다고 말하자 에밋은 다시 믿음을 잃는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타인이 나를 믿어줄때 보다 스스로 자신을 믿을때 더욱 강력한 법이다. 그가 스스로를 믿기 시작하자, 그는 진정으로 특별해진다. 몸을 내던져 스스로를 희생한 에밋은 창조주를 조우하고 부활한다.
이 영화는 영웅 플롯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비튼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특별'하다. 억만장자이거나, 천재거나, 초능력을 가졌거나, 외계인이거나. 우리는 영웅을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한다. 하지만 영웅에 되는데에 조건은 필요없다. 루시는 스스로가 '스페셜'이기를 갈망한다. 특별해지고 싶어서 이름도 수도 없이 바꾸고 영웅의 증거인 저항의 조각을 찾아 헤맨다. 그 모든 조건은 허상이다. 루시는 자신이 영웅이 되기로 결심한 순간, 영웅이 된다. 모든 이의 특별함을 믿고 스스로 깨우치게 만든다.
반면, 로드 비지니스는 개성을 용납할 수 없다. 그는 독재국가를 상징한다. 모두가 개성을 죽이고 창조성없이 설명서에 따라 사는 세계가 그의 이상향이다. 심지어는 조금의 자유조차도 용납할 수 없어 강력접착제로 모두 고정시켜버릴 계획을 세운다. 그에게 있어 개성이 넘치는 마스터빌더는 눈엣가시같은 존재다. 자신이 만든 세계를 조금이라도 변형시킬 수 없으니까.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 철저하게 구역을 나누어 세계를 정리한 것은 인종분리와도 유사해 보인다. 대중들은 통제된 언론을 믿으며 진실을 모른채 살아간다. 이는 매트릭스와 같다. 통제된 세상에서 기계들의 조작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 마스터빌더는 탈출한 인간이고 에밋은 네오다. 매트릭스는 보이지 않는 매스미디어의 힘에 의해 움직이며 개개인의 선택을 박탈당하고 개성을 거세하는 사회다. 내 생각, 의지 같은 것은 거대한 공권력에 의해 묵살당한다.
이 사회는 일견 깨끗하고 정돈되어 보인다. 더러운 것, 눈에 띄는 것은 모두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창조하는 자들은 모두 도망가거나 숨어버린다. 로드 비지니스는 자신의 큰 꿈을 위해 타코 화요일을 실행한다. 강력접착제를 뿌림으로서 모두의 자유를 영원히 빼앗으려 한다. 거대 공권력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빼앗은 세상은 모든 독재자의 꿈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독재를 무너뜨리는가? 그것은 창조성이며 예술이다. 루시의 연설을 들은 레고들은 스스로 마스터 빌더가 된다. 획일화된 사회에서 상상도 못한 것들을 창조해낸다. 예술은 독재를 무너뜨릴 힘을 가진다. 예술이 상징하는 것은 개개인의 특별함이기 때문이다. 강압적인 진압에도 레고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서 맞서 싸운다. 결국 모든 시민이 스스로의 특별함을 깨우치는 것이 진정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리는 길이다.
레고 세상의 로드 비지니스는 인간 세상의 아빠다. 아빠는 어른이 된 어린아이다. 체제에 순응하고 개성을 죽이는 법을 배운 존재다. 반면 핀은 아직 사회의 법칙에 물들지 않고 자유롭게 개성을 발산하는 존재다. 아빠는 모든 것이 제 위치에 정돈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비록 어린아이용 장난감일지라도. 아빠에게 있어 레고는 장난감이 아니다. 자신의 독재적 욕망을 발산하는 매개체이다. 핀은 그런 아빠가 이해되지 않는다. 장난감은 응당 즐기기 위한 것인데, 왜 아빠는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걸까?
니체는 말했다. 위버멘쉬를 이루기 위해서는 놀이하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핀이 마음껏 레고를 가지고 노는 모습은 위버멘쉬에 가까워 보인다. 레고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삶이라는 것은 여러 아이들이 함께 레고를 만드는 것과 같다. 다양한 아이들이 만든 다양한 레고들은 얽히고 섥히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다른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낸다. 마냥 설명서를 따르지 않을때 놀라운 기쁨이 따라온다.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적용할 수 있는 지혜다. 설명서는 그저 가이드 라인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마음껏 레고를 만들 자유가 있다. 인간을 뛰어넘는 초인(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학습된 사회적 고정관념과 강박을 떨쳐버리고 나 자신의 예술을 창조해야 한다.
레고 무비는 두 개의 세계를 표현한다. 창조물의 세계와 창조주의 세계. 창조물인 레고와 창조주인 인간. 이는 창조물인 인간과 창조주인 신을 은유한다. 창조물의 세계는 창조주의 장난감 놀이에 불과하다. 창조주의 위대한 권능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굉장히 종교적이다.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신들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러나 레고에게 있어 창조주가 인간인 것처럼 인간의 창조주인 신도 인간과 다를바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창조물과 창조주는 상호 소통하며 배워가는 존재다. 신과 인간이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유일신보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러 신들을 떠오르게 한다. 신이 존재하기에 인간이 나약하고 삶이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삶은 인간의 삶대로, 신의 삶은 신의 삶대로 그 의미를 가진다. 장난감일 뿐인 레고의 세계가 풍부한 이야기와 메세지로 가득 찬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