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이의 콘텐트/미디어 생각 #6
지난 글들을 통해서 미디어 산업의 구조 안에서 콘텐트는 오랜 시간동안 광고판의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다루어 왔습니다. 그 형태는 제작지원, PPL, 프로그램 전후 광고 등등으로 다양했지만, 결국 콘텐트가 그러한 구조 안에서 떠맡은 역할은 달라지지 않았죠. 그런데 미디어 산업의 구도가 바뀌면서, 콘텐트는 더 이상 ‘광고판’의 역할에만 만족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콘텐트는 광고 그 자체가 되고, 광고는 콘텐트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처럼 광고 업계와 콘텐트 업계의 경계가 본격적으로 허물어지고 있는 현재의 시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본격적인 내용을 진행하기에 앞서, 광고도 콘텐트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콘텐트인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오늘 글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오늘 글에서의 콘텐트는 기껏해야 광고판의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었던, ‘콘텐트 자체적으로는 광고의 성향을 띄지 않는 콘텐트’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겠습니다.
1. 콘텐트화된 광고
이 개념은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합니다. 72초TV의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특별편들, 그리고 페이크(Fake)와 같은 작품도 ‘콘텐트화된 광고’라고 볼 수 있겠지요.
사실 광고이자 콘텐트, 혹은 콘텐트이자 광고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형태가 전무했던 것은 아닙니다.
지난 2001년과 2002년에 걸쳐 BMW는 ‘더 하이어(The Hire)’라는 제목으로 총 8편의 단편 영화 시리즈를 선보였었습니다. 당시 ‘더 하이어’는 자동차 회사가 만든 단편영화라는 점에서 업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존 프랑켄 하이머, 이안, 왕가위 등의 거장 감독들이 참여한 시리즈라는 점에서 더욱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성공적인 캠페인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참고 : http://www.autodiary.kr/2016/10/4148281/ )
2012년에는 인텔과 도시바가 제작했던 The Beauty Inside가 세계적인 유명세를 끌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브랜디드 콘텐트의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칸 국제 광고제와 클리오 국제 광고제의 그랑프리를 석권할 만큼 광고업계에 큰 반향을 몰고 왔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해외에서는 저명한 광고 시상식을 모두 휩쓸며 ‘훌륭환 광고’로 인정을 받았던 이 작품이 우리나라로 넘어와 리메이크되면서 광고를 모두 뺀 ‘영화’로 탈바꿈했다는 것입니다. 영화로 제작돼 큰 인기를 끌었던 ‘뷰티인사이드’는 최근에는 드라마로까지 제작되기도 했죠. 이것은 뷰티인사이드의 원작이 광고가 아닌, 콘텐트로서의 가치와 잠재가 충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참고: https://en.m.wikipedia.org/wiki/The_Beauty_Inside_(2012_film))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런 프로젝트들이 많지는 않았었습니다. 아직 레거시 미디어에 거의 모든 미디어 권력이 집중 돼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들을 만들었어도 사람들에게 널리 보여줄 수 있는 통로가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값비싼 임금의 제작진이 투입돼야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영상을 뽑아낼 수 있던 시대였습니다. 내보낼만한 채널도 마땅히 없는 상황에서 굳이 비싼 비용을 들여 ‘작품’을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판도는 디지털 플랫폼의 대중화를 맞딱뜨리고 나서 크게 흔들립니다. 디지털 플랫폼의 활용과 이용이 보편화되면서 누구나 콘텐트를 만들어 배포할 권한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콘텐트를 배포할 수 있게 되니, 더 많은 창작자와 창작사가 이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편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면서, 콘텐트의 길이, 형태, 주제 등 모든 것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TV가 아닌 디지털 플랫폼들을 통해 콘텐트들을 많이 즐기게되어, '작품'을 굳이 TV에 내보내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저렴한 비용으로 고퀄리티의 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훨씬 더 손쉽게 널리 배포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광고 같아 보이는 콘텐트, 콘텐트 같아 보이는 광고 같은 작품들이 흔해진 것은 이러한 미디어 권력의 재분배와 직결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광고 업계와 콘텐트 업계의 ‘윈-윈’ 게임
콘텐트 제작사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다보면, 아.. 광고와의 접점이 많아지고 있구나... 콘텐트가 광고와 잘 결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을 전환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광고업계는 있는 돈을 가지고, 그 돈으로 “어떤 크리에이티브한 (광고)콘텐트”를 만들면 될까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콘텐트업계는 재미있는 콘텐트를 가지고 “여기에 돈을 누가 낼 수 있지?” “이것의 가치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지?” 등등의 고민을 합니다.
어떤가요? 무언가 이상하다 싶지 않나요?
돈이 되는 광고를 만들어야 하는 광고 업계는 끊임없이 “크리에이티브”에 대하여 고심하는 반면, 크리에이티브한 콘텐트를 만들어 나가야할 콘텐트 업계는 끊임없이(라기 보다는 최근들어 심하게) “수익화”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두 업계의 고민 포인트가 어딘지 뒤바뀌어 있는 듯한 느낌이지요.
이는 바꾸어 말하면, 두 업계가 충분히 윈-윈(win-win)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광고 업계는 돈을 쥐고 있고, 콘텐트 업계는 크리에이티브를 쥐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패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죠.
이는 사실 새로운 사실은 아닙니다.
다만, 이전에는 "광고"와 "콘텐트"가 구분되었던 것이고, 지금은 "광고"와 "콘텐트"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두 업계가 결국 같은 "광고" 혹은 같은 "콘텐트"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3. 광고업계와 콘텐트업계, 같은 방향을 보고 달리기 시작하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스토리랩’이라는 콘텐트 회사가 있습니다. 전세계 영상 콘텐트들의 포맷을 유통하고, 제작도 하며 투자도 합니다. 즉, 스토리랩은 전형적인 콘텐트회사의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사실 스토리랩은 세계적인 광고대행사 덴츠가 만든 회사입니다. 스토리랩은 덴츠의 영업망을 활용하여, 재미있는 콘텐트에 어울릴만한 광고주들을 섭외하고 거기에 방송국들도 함께 엮어 콘텐트 비즈니스를 진행합니다.
광고대행사가 전형적인 콘텐트 회사를 만들었고, 거기에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프라를 장점으로 활용한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난 몇년 간 스토리랩이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스토리랩의 등장과 성장은 무엇을 시사하는 걸까요?
광고업계와 콘텐트업계가 점점 더
같은 콘텐트를 만들고
같은 비즈니스를 하며
회사의 구조 또한 점점 비슷해져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현재 스토리랩이 콘텐트를 유통하는 주요 창구는 TV이긴 합니다. 하지만 스토리랩은 디지털 플랫폼을 상대로한 유통 또한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디지털의 비중은 계속 늘어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스토리랩과 같은 회사가 제작하고 유통하는 콘텐트가 아마존이나 레드불 같은 非미디어 기업의 플랫폼에서 방영되는 것은 머지 않아 굉장히 흔한 일이 되겠지요. 그런 사례가 생길 거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고, 머지 않아 완전히 일반화 될 거라는 의미입니다. 전세계 유수의 광고대행사들은 이미 스토리랩같은 자회사를 만들어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CJ ENM이 이와 비슷한 형태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4. 정리
콘텐트 업계나 광고 업계나 여전히 서로 다른 영역들이 존재합니다. 아직까지도 레거시 미디어는 견고하고, 강력합니다. 콘텐트 업계나 광고 업계나, 여전히 ‘큰 돈을 만지려면’ 레거시 미디어의 권력에 기대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광고업계의 매체비는 점점 콘텐트 제작비로 쓰이고, 非미디어 회사들이 운영하는 미디어들이 점점 늘어가고, 기존 미디어에 非미디어사들이 제작한 콘텐트들의 비중이 늘어가고 있는 것 또한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얼마 전 에미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신감독의 슬기로운 사생활”은 CJ오쇼핑과 함께 만든 콘텐트입니다. 기존의 시각에서 볼 때의 전통적인 '미디어'는 전혀 끼어있지 않은 프로젝트입니다. 그런 콘텐트가 전세계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TV인더스트리 어워즈인 에미 어워즈 후보에 오른 것입니다. 에미 어워즈 현장에서 진행된 패널 토크에서 관련 내용이 언급되었고, 현장에 있던 전세계 유수의 미디어 관련자 분들이 이 부분에 굉장한 흥미를 보였습니다.
2012년, ‘The Beauty Inside’는 그 해의 칸 광고제와 클리오 국제 광고제 등 유수의 광고제를 휩쓸며 ‘콘텐트화된 광고의 가치’를 입증하였습니다. 올해 에미어워즈에 노미네이트된 ‘신슬사’는 이와는 반대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커머스와의 협업을 통해 제작된 광고 콘텐트가 세계적인 방송 콘텐트 시상식에 진출한 것이니까요. 신슬사는 ‘광고화된 콘텐트의 가치’를 보여준 셈입니다.
‘The Beauty Inside’는 더 광고스러워서 광고제 출품을 선택한 것일까요? ‘신슬사’는 더 콘텐트스러워서 방송 시상식에서 성과를 거둔 것일까요? 아니요, 이 두 작품의 행보가 다른 이유는 오로지 ‘관점의 차이’뿐일 것입니다. ‘The Beauty Inside’의 출발점은 인텔과 도시바의 광고 캠페인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신슬사’는 당시 72초TV에 막 입사했었던 신감독의 기획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올해부터는, 하나의 콘텐트가 광고제와 콘텐트 시상식 양쪽에서 모두 수상하는 사례들이 나오기 시작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
이 시리즈는, 미디어/콘텐트 산업에 대한 대표이사의 생각을 칠십이초 사내 구성원들과 공유하기 위하여 얼마 전부터 시작한 연재입니다. 내부에만 공유하려다, 혹시라도 콘텐트와 관련하여 사업을 시작할 생각을 하고 계시거나, 저처럼 업계의 현황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고 계실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외부에도 공유하기로 하였습니다. 노파심에 앞서 말씀드리자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이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읽는 분들의 몫으로 돌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비 정기적으로 발행될 예정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앞으로 무수히 언급될 '미디어'라는 용어는 '콘텐트 + 플랫폼'을 통칭하는 뜻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콘텐트’는 주로 '엔터테인먼트성 영상 콘텐트'를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