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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내면통제에 대하여

나에게 너그럽지 못한 이유

by 치기

문득 난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통제하려 할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퇴근하고 운동하러 가야겠다는 다짐이라든지 어제 많이 먹었으니 오늘 저녁은 굶을 거라는 결심이라든지…


이번에 쓸 주제는 통제이다. 주제를 잡고 단어가 가진 뜻에 대해 찾아봤는데 통제, 규제, 억제, 구속처럼 비슷하게 파생된 단어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외국사람한테 단어를 설명할 때 뭐라 똑 부러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래서일까. 그저 뉘앙스에 따라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단어가 적재적소로 문장에 배치되어 사용된다. 그래서 국어 선생님이 있는 거겠지?


아무튼, 이번 이야기는 스스로를 너무 엄격하게 통제하려 한 나 자신과 지키지 못한 약속의 잔재들을 바라보며 쓰는 글이다. 자기 검열이 심한 사람들에게 공감되는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 감정기복이 잦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잦은 이유가 어디에서 오는지 계속해서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통제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나의 성장 원동력이자 스스로를 옭아매는 가시이기도한 것 같다. 무엇이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 묘한 경계는 끊임없이 나를 고뇌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압박하는 것에 익숙해진 나에게 제대로 된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한 적이 생각이 들었다. 씁쓸한 마음과 함께 상처받은 나 자신을 너그럽게 대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통제에 대해 3가지 이야기를 생각해 봤다.



첫 번째로 생각의 모든 걸 약속으로 규정했다.


정말 최근에 느낀 생각이다. 워낙 이렇게 살아온지라 이걸 발견한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생각 하나하나를 나 스스로와 약속으로 여겼다는 걸 깨달았다. 이 모든 걸 지키려 하는 강박이 나를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었다는 걸 인생 살면서 처음으로 느꼈다. 이 사소한 것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난 나에게 실망하고 금방 자괴감에 휩싸인다.


자기 계발 영상을 보면 큰 목표를 세우고 지키지 못했을 때 실망하지 말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라는 말이 있었다. '5분이라도 책을 매일 읽어라', '팔 굽혀 펴기 2개를 매일 해라' 그런 게 나에겐 잘못 적용된 사례가 아닌가 싶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소한 모든 걸 약속했으니 말이다. 약속에 파묻힌 나를 이제야 들춰보게 되었다. 통제 속에 살아온 내가 얼마나 그 통제에 잘 대응하며 살아왔을까. 분명 실패가 더 많았을 거다. 거기에서 오는 자괴감과 싸우고 깊은 우물에 들어갔겠지. 억압받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 내가 누구보다 미친 듯이 나를 억압하려 했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생각은 그저 생각으로 두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이걸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엄청 큰 도약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남에게 인정받고 싶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기 검열에 더 엄격했다.


갤럽강점검사라는 강점분석테스트가 있다. 검사 결과 여러 가지 강점 중에 가장 높은 것이 책임감이었다. 그 책임감이 나의 안과 밖으로 나 스스로를 통제하려고 하는 걸까. 갤럽강점검사 코치님이 결과를 풀이해 주시는데 같은 책임감이라도 다 다른 결과가 나오는데 나의 책임감은 힘든 재능이라고 했다. 혼자 계속 목표를 세우는 자신을 보며 뿌듯함을 느낀다고 하지만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고 한다. 그 마저도 신뢰와 책임의 일부분인 걸까. 스스로에게 만족감뿐 아니라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쟁취하고 싶은 마음인 걸까. 비교할 대상이 없을 때에도 나라는 사람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향해 간다. 그게 어디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인생인가. 나는 계속해서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


어느 심리상담가는 인간이 불안과 회피 성향을 가지게 되는 건 유년시절을 곱씹고 파헤치다 보면 이유가 나온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곱씹는다는 게 사실 기억도 잘 안나기도 하지만 마치 두렵기도 한 판도라의 상자 같기도 하다. 기억이 흐릿한 와중에도 몇몇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기도 하다. 부모님은 모임으로 바쁘고 언니오빠는 클 만큼 커서 집에 자주 혼자 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외롭고 무서웠던 것 같다. 그리고 감수성이 상당히 풍부했고 사랑이 많았다. 짝사랑을 거의 10년 동안 해본 적도 있으니까. 그 후로 사랑을 오래도록 이어가 본 적은 없던 것 같다. 여러모로 감정을 억제하려는 게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굳은살이 된 걸까. 이러한 것들이 한데 모여 불안하게 통제라는 형식으로 만드러 진 걸까.


다만, 이런 생각을 하며 느낀 건 나는 스스로 칭찬에 인색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목표를 세우다 보니 쉼표가 없는 것 같다. 놀 때도 어떻게 해야 잘 놀지, 쉴 때는 어떻게 해야 힐링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지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고 뿌듯함을 찾으려 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믿고, 믿으려 하고, 믿고 싶기에 계속해서 스스로 시험하려고 했다.


나의 강점인 책임에서 비롯된 것 같다. 나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구멍이 생기면 실망도 크다. 수시로 튀어 오르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냐 없냐의 기로에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면 나는 스스로를 멸시하기 시작한다.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숭배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결국 자신을 잡아먹는다. 아름다움을 숭배하면 자신이 항상 못생긴 것처럼 느껴지고, 돈을 숭배하면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무엇이든 믿고 의지하게 되면 결국 탓하게 되기도 하고 탓이라는 화살에 잠식당하기도 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믿기에 결국 나를 잡아먹는다는 뜻도 된다는 것이다.


유튜버 드로우 앤드류 영상에서 어떤 게스트가 한 말이 있다.

인간은 결핍 덩어리기에 의지할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놔야 해. 나만 믿으면 내가 무너졌을 때 회복하기가 어려워. 그렇기에 내 계획 밖이든 안이든 내가 관장할 수 없는 영역에 책임을 맡겨 놓으니까 마음이 편해.


이 말을 듣고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카>를 본 후에 내 감정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초월적인 곳에 책임을 맡겨 놓는 것은 한 편으로 나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바보 같은 방법 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게 살아가기는 쉬운 방법인 것도 같달까.


우리는 목표나 목적 없이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는 없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평온을 유지하며 무엇에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온전히 나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삶. 내 안에서 모든 게 돌아가는 삶. 그게 나의 목표라면 목표다. 하지만 이건 정말 힘들어. 저 말들을 듣고 때론 너무 지치고 힘들 땐 나의 영역과 맞닿지 않은 초월의 무언가를 믿고 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기도 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는 것도 그런 이유이지 않을까.



나는 나 스스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칭찬에 후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요즘 감사일기를 쓰려고 노력한다. 세상에 감사한 건 꽤나 있는데 셀프 칭찬은 참 어렵다. 내가 나를 칭찬 못하는데 남한테는 얼마나 잘할까 싶다.


내가 가진 많은 사랑을 나에게도 주자. 시도 때도 없이 스스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말자. 나는 목표를 향해 잘 나아가고 있고 작은 것 하나하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 말자.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나를 믿기에 잘 해낼 거라는 걸 안다. 롱런을 위해 나의 컨디션도 생각해 주자. 나의 리듬과 템포에 귀 기울여주는 시간을 갖자.


갑자기 자기 다짐이 되었는데 이 글을 빌어 되새김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이상 통제에 대한 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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