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의 실체

통장을 스쳐 가는 사이버 머니, 이대로 괜찮을까?

by 이불킥

:나는 돈을 버는가, 빚을 갚는가

​"띠링."


​매월 25일, 오전 10시.
지옥철에서 시달린 내 영혼을 잠시나마 구원해 주는 유일한 구원자, 입금 알림 문자가 도착한다. 숫자를 확인한다. 그래, 이번 달도 30일간의 인내심 테스트를 견뎌낸 대가치고는 귀여운 금액이지만, 어쨌든 들어왔다.


​하지만 이 기쁨의 유효기간은 짧다. 아니, 찰나다.
곧이어 내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카드사] OO님 1월 결제금액 출금 완료"
"[은행] 대출이자 출금"
"[통신사] 자동이체 완료"
"[관리비] 출금 완료"


​마치 하이패스를 통과하는 자동차처럼, 내 월급은 통장이라는 톨게이트를 멈춤 없이 질주해 빠져나간다. 과거 싸이월드 시절 일촌들이 외치던 "퍼가요~♡"가 내 통장에서 실시간으로 재현된다.


​오후 2시쯤 통장 잔고를 확인했을 때, 그곳엔 월급의 흔적(로그)만이 남아 있다. 내가 만져보지도 못한, 잉크 냄새도 맡아보지 못한 그 돈. 이것은 실물 화폐인가, 아니면 그저 화면 속에서 깜빡이는 '사이버 머니'인가.


​내 젊음의 등가교환 법칙
​허무함이 밀려온다. 단순히 돈이 스쳐 지나가서가 아니다. 저 '사이버 머니'가 무엇과 교환된 것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저 돈은 지난 한 달간 상사의 불합리한 지시에 "네, 알겠습니다"라고 억지로 끄덕인 내 목 관절 값이다.
야근 식대로 때운 인스턴트 음식에 망가진 내 위장 값이다.


아침마다 이불 속에서 "5분만 더"를 외치며 억지로 일으킨 내 무거운 육신 값이다.


​'나의 시간 + 나의 건강 + 나의 감정 = 월급'


​이 잔인한 등가교환 법칙 앞에서, 나는 자꾸만 손익분기점을 따지게 된다. 과연 남는 장사일까?
월급은 나를 살게 하는 생명수라는데, 왜 나는 월급을 받을수록 점점 더 생기를 잃어가는 기분일까. 회사는 나에게 월급을 주어 나를 '구독'하고, 나는 그 월급으로 카드 할부를 막으며 삶을 '연명'한다. 이 쳇바퀴는 너무나 견고해서, 감히 멈출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시발비용과 금융 치료의 함정
​사이버 머니가 되어 사라지는 월급이 허무해서일까. 우리는 종종 '보상 심리'라는 함정에 빠진다.


​"스트레스받는데 매운 거나 먹자." (배달비 포함 3만 원)
"오늘 너무 힘들었으니까 택시 타고 갈래." (택시비 2만 원)
"이 정도는 나를 위해 써도 돼." (할부 3개월)


​이른바 '시발비용'. 욕이 나올 만큼 스트레스를 받아서 쓰는 비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가 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회사가 준 돈을 쓴다. 그리고 그 돈을 메우기 위해 다음 달에도 회사에 나와야 한다. 완벽한 자본주의의 노예 시스템이다. 금융 치료는 잠시 통증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일 뿐, 병의 원인을 제거해주진 못한다.


사이버 머니를 '자유 이용권'으로 바꾸는 법
​입사 3년 차, 통장을 스쳐 가는 사이버 머니를 보며 나는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돈을 그저 '소비'하고 '소멸'시키는 데 쓴다면, 나는 평생 이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살다가 폐기될 것이다.


​나는 월급의 정의를 다시 내리기로 했다.
이것은 내 노동의 대가나, 카드값을 막는 방패가 아니다.
이것은 훗날 내가 이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줄 '탈옥 자금'이다.


​비록 통장을 스치듯 지나가더라도,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아주 작은 일부를 떼어내 다른 이름의 통장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존버(존중하며 버티기) 통장'.
금액은 크지 않다. 하지만 이 돈의 목적은 명확하다. 단순히 물건을 사기 위함이 아니라, 언젠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았을 때, 혹은 도저히 못 견디게 싫은 순간에 "안녕히 계세요!"를 외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Safety Net)를 만드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허무하게 사라지던 사이버 머니가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돈은 나를 구속하는 족쇄가 아니라, 언젠가 나에게 자유를 줄 '자유 이용권'의 적립금이다.


​오늘도 통장 잔고는 '0'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괜찮다. 그중 아주 일부는, 분명 나를 위해 어딘가에 쌓이고 있으니까.
스쳐 가는 월급을 붙잡고 묻는다.
"너는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 거니?"


​다음 달 월급날까지, 나는 또다시 버틸 힘을 얻는다.
언젠가 이 사이버 머니가, 진짜 내 삶을 사는 현실의 티켓이 되어줄 그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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