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은 언제나 아름답...을까?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다. 주인공이 악덕 상사 면전에 사직서를 팍 던지며 "나 그만둡니다!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라고 소리친 뒤, 박스를 들고 쿨하게 사무실을 나가는 장면. 배경음악으로는 희망찬 밴드 음악이 깔린다.
하지만 현실의 퇴사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루하고 치사한 '행정 처리'의 연속이다.
"김 대리, 인수인계서 폰트는 왜 이래? 다시 해와." "법인카드 쓴 거 영수증 하나 비는데? 이거 처리 안 되면 퇴직금 정산 늦어져." "퇴사한다고 일 대충 하네? 평판 조회 들어오면 내가 어떻게 말해줄 줄 알고."
사직서를 낸 순간부터 나는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는다. 쿨한 퇴장? 어림없다. 책상 밑에 쌓인 3년 묵은 먼지를 닦아내고, 후임자에게 폴더 경로 하나하나까지 설명해주며, 인사팀과 연차 수당을 놓고 10원 단위까지 싸워야 한다.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그저 피곤하고 구부정할 뿐이다.
퇴사 충동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때가 있다. 팀장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을 때, 또는 금요일 저녁 회식 공지가 떴을 때. "아, 진짜 못 해 먹겠다. 어디든 여기보단 낫겠지."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여기만 아니면 돼'라는 마음으로 하는 이직은 99% 실패한다. 그것은 이직이 아니라 '도피'이기 때문이다. 지옥을 피해서 도망친 곳이 천국일 리 없다. 그곳은 또 다른 형태의 불지옥일 확률이 높다. (일명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만국 공통이다.)
진정한 이직의 타이밍은 '이곳이 너무 싫을 때'가 아니라, '내가 갈 곳이 확실할 때',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더 이상 배울 게(빼먹을 게) 없을 때'여야 한다. 감정에 휩쓸려 사표를 던지는 건 상사에게 복수하는 게 아니다. 준비 없이 광야로 내몰릴 내 통장과 미래에 대한 자해 행위다.
많은 직장인이 퇴사하면서 '복수'를 꿈꾼다. 인수인계 파일을 싹 지우고 나갈까? 거래처 연락처를 들고 튈까? 마지막 날 팀장한테 쌍욕을 박을까? 하지만 그런 복수는 하수나 하는 짓이다. 업계는 좁고, 소문은 빠르다. 굳이 내 평판에 스크래치를 내면서까지 그들에게 감정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최고의 복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철저하게 '무관한 사람'이 되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퇴사하는 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팀장에게 인사했다. "팀장님, 그동안 많이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속마음: 덕분에 반면교사 잘 삼았습니다.) 건강하세요!"
그가 나를 잡든, 욕하든, 비꼬든 이제 상관없다. 내일부터 나는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이니까. 내가 회사를 나가서 더 좋은 연봉을 받고, 더 워라밸 좋은 곳에서 얼굴이 훤하게 펴서 돌아다니는 것. 그리고 전 직장 동료들이 "와, 걔 나가더니 얼굴 좋아졌더라"라고 수군대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를 괴롭혔던 모든 이들에게 날리는 가장 우아하고 치명적인 한 방이다.
이직을 앞둔, 혹은 퇴사를 고민하는 당신에게 전한다.
환승은 치밀하게: 다음 회사의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연봉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뒤에 사직서를 내라. 구두 약속만 믿고 그만뒀다가 낙동강 오리알 된 사람 여럿 봤다.
흔적 지우기: 회사 PC의 카톡 로그아웃은 물론이고, '다운로드 폴더'와 '바탕화면'도 싹 밀어라. 당신의 사적인 흔적을 남겨서 득 될 건 하나도 없다.
마무리는 깔끔하게: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인수인계서는 바보가 봐도 알 수 있게 완벽하게 만들어주고 나와라. 그래야 퇴사 후에 "김 대리, 이거 어딨어?"라는 전화가 오는 끔찍한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훌륭한 인격자여서가 아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던지고, 나를 위한 새로운 챕터로 걸어가는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죄책감 갖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마음속으로만 외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