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무기

회사 밖에서도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기술은 있는가

by 이불킥

: 명함이 사라진 당신은 누구입니까?

여기, 두 장의 명함이 있다. 하나는 회사의 로고와 직함이 박힌 명함. 다른 하나는 오직 내 이름 석 자만 적힌 명함.


우리는 보통 전자(前者)의 힘을 내 힘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안녕하세요, OO물산 마케팅팀 김 과장입니다." 거래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는 건 '김 과장'인 나에게 숙이는 걸까, 아니면 내 등 뒤에 있는 'OO물산'이라는 간판에 숙이는 걸까. 슬프게도 답은 명확하다. 회사라는 배경을 지우개로 싹 지워버렸을 때, 과연 나는 그들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인가.


"계급장 떼고 붙어보자"는 말은 싸울 때나 쓰는 말이 아니다. 퇴사하는 순간, 우리는 매일매일 계급장 없는 야생에서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회사형 인간'의 치명적인 함정

입사 5년 차, 나는 내가 일을 꽤 잘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회사 전용 ERP 프로그램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이사님 취향에 딱 맞는 보고서 폰트를 골라내며, 회식 자리에서 기가 막힌 비율로 소맥을 말았으니까.


하지만 이직 시장의 문을 두드려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가진 기술들은 철저히 '이 어항(회사) 안에서만 통하는 생존 수영법'이었다는 것을.

내부 결재 잘 받는 법? 다른 회사 가면 시스템이 다르다.

사내 정치 라인 타는 법? 나가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눈치 빠르게 의전 하는 법? 비서로 갈 게 아니라면 경력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회사의 부품으로서 최적화된 '회사형 인간'이었을 뿐, 시장이 원하는 '시장형 인간'은 아니었다. 회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 그것이 명함을 뗀 내 적나라한 성적표였다.


밖에서 팔리는 '진짜 기술'을 연마하라

불안하다면 지금 당장 이력서를 켜고 '보유 기술' 란을 채워보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능력", "성실함", "책임감"... 이런 추상적인 단어들 말고, 당장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구체적인 무기가 있는가?


회사 밖의 세상은 냉정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는 통하지 않는다. "이걸 할 줄 압니다"만 통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자리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1. 직무의 전문성(Hard Skill) 내가 마케터라면, 회사 이름 떼고도 매출을 일으킬 수 있는 퍼포먼스 능력이 있는가? 내가 인사 담당자라면, 노무 이슈를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지식이 있는가? '회사 시스템'이 해주는 것 말고, '내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실무 능력을 길러야 한다.


2. 대체 불가능한 기록(Portfolio) "제가 큰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라는 말은 힘이 없다. "제가 이 프로젝트의 A부터 Z까지 기획하여 매출을 20% 올렸습니다"라는 '숫자와 결과'가 필요하다. 지금 하고 있는 업무를 단순히 '쳐내는 일'로 여기지 말고, 나중에 내 포트폴리오 한 줄로 넣을 수 있도록 기록하고 정리해라.


3. 회사 밖 네트워크 회사 명함으로 만난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라. 내가 회사를 옮겨도 나를 찾아줄 클라이언트, 내가 곤란할 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업계 선배. 회사의 울타리가 사라졌을 때 나를 지켜줄 건 결국 내가 쌓아둔 '사람 자산'이다.


회사를 최고의 '유료 학원'으로 이용하라

이 글을 읽고 "당장 퇴사해서 기술부터 배워야지"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가장 좋은 배움터는 바로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그 사무실이다.


생각을 바꿔보자. 회사는 나에게 월급을 주면서 업무를 가르쳐주는 '돈 주는 학원'이다. 회사 돈으로 마케팅 실험을 해보고, 회사 인프라로 영업 노하우를 배우고, 회사 지원으로 자격증을 따거나 교육을 들어라.


나는 이제 회사를 다르게 정의한다. 이곳은 나의 평생직장이 아니라, 내가 독립하기 전까지 나를 트레이닝시켜 주는 '인큐베이터'라고. 야근을 하더라도 "이건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실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이야"라고 생각하면 덜 억울하다. 기왕 하는 고생이라면, 남 좋은 일만 시키지 말고 내 근육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에필로그: 비 오는 날, 우산 없이도 걸을 수 있도록

회사는 거대한 우산이다. 그 안에 있을 땐 밖이 비바람이 부는지 태풍이 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우산이 접히는 날이 온다. 정년퇴직이든, 권고사직이든, 자발적 퇴사든.


그날이 왔을 때, 비에 젖은 생쥐 꼴로 떨고 싶지 않다면 준비해야 한다. 우산 속에서 안주하지 않고, 나만의 방수복을 껴입는 연습을.


나의 무기는 날카롭게 갈려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날, 그때가 바로 진짜 사직서를 던질 수 있는 날이다. 그전까지는, 조용히 그리고 치열하게 칼을 갈자. 월급이라는 숯돌에 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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