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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헌 Aug 07. 2021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1. 시골소년 서울여행기 1975

경기도 시골이 무슨 대단한 '촌'이냐고 하겠지만

21세기 현재 100 도시가 무슨 '시골'이냐고 

반문하겠지만

70년대만 해도 경기 남부 여주 

이천 용인은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1972년 영동고속도로가 집 뒤로 뚫리고

읍내<->용산터미널까지 4,50 밖에 

 되는 물리적 거리임에도

동리엔 서울 가본 친구들이 적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부는 

진짜 아랫지방 시골부터 전기를 깔아

우리 동네는 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전기가 들어왔고

그저 '울긋불긋 꽃피는 산골'이었다.

1960년대 중반 그리운 어머니와 두살배기 나


공장, 특히 영등포 등지에서 폐수, 매연을 

내뿜던 공해업소들을

정부는 교통 편리한 우리 동네로 이전시켰다.


이름도 아름다운 오래된  고림리(古林里),

버드나무  동네 유방리(柳芳里)에는

제지공장, 낚시 공장, 화학공장,

피혁공장이 들어섰다.


덕분에 하천과 인심은 오염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동네엔 사람들이 넘쳤고 

우리 집은 공사현장 임시 함바집을 하곤 했다.

어머니 음식 솜씨는 일가견이 있었는데,

그 밥 드시던 노동자 중 한 분이 서울 분이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부탁을 했겠지.

우리 큰아들 나중에 서울   

서울 구경  시켜달라고...


1975년인가  아저씨를 따라 

처음 서울로 가게 됐다.

동네 또래 중에서는 아주 일찍 

신세계를 경험한 셈이었다.

아저씨 집은 지금 생각해 보면 달동네인데

밤풍경을 보여주시며 저기가 

 유명한 삼일빌딩이라고 일러 주었다.

검고 길쭉한 초고층 빌딩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나를 데리고 

김포공항을  주셨다.

배웅하는 터미널에 가면 어마 무시한 

비행기도 보고  텐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사 .

승객 이외 모든 곳이 폐쇄되어 있었다.

경비에게 부탁해 공사장 문으로 빼꼼 

잠시  공항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골로 돌아와 남대문은 문이  개라는 식의 

거짓말 박사 후배를 제압하고

쌀나무라고 신기해하는 서울내기들에게

'나도 서울 갔다 왔다'라고 자랑하는 것에

만족했지만 아직도 처음 서울 구경은 

섬마을 아이들의 나들이처럼 흥분되는 기억이다.


이제 부산에 사는 나는

부산에 처음  본다는 서울 토박이 

이모님을 모시고

여기저기 다니며 서울살이에 대해 

담소를 나누곤 한다.


다음 이야기는 서울 이모집 지하실의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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