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기헌 Aug 10. 2021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9. 역마살의 애향가-고향을 다시 가다 2012


스무 살 때까지는 일주일 이상

고향을 떠나 본 적 없던 내가

37년 넘게 타향살이하는 거 보면

역마살이란 게 있긴 있나 보다.


전국 혹은 해외를 떠돌다

어쩌다 가는 고향은

어머니의 따듯한 밥 한 끼가

이미지로 남아있으되

이젠 어머니마저 안 계시니 고향이 덜 살갑다.


그 고향 경기도 용인 우리 동네 이야기를

잠시 해 볼까 한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유림동 산골마을.     

영동고속도로 용인 IC 근처.     

봄이면 꽃대궐을 이루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오른쪽으로는 영동고속도로를,    

왼쪽으로는 용인 시내를 두고     

앞으론 경안천과 경전철을 두고 있다.     


동네 이름은 단사 혹은 산골말이었다.

'산골마을'이란 아름다운 말이 뜻하듯

깊고 높지 않지만 작은 산들로 둘러 싸여 있다.     

 


인근 논과 밭을 부쳐 먹으며     

오손도손 살았다.     


크게 가난하지도 크게 부자도 없었다.     

경기도 남부지방 사람들이 그렇듯

유순한 성정을 지니고     

동네 어른들이 서로 도와가며 어울렁 사는

전형적인 공동체 시골마을이었다.     


집 호수래 봐야 30여 호 남짓.     


동네가 번잡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 영동고속도로가 마을 뒤를

뻥 뚫기 시작하면서부터.     


논, 밭이 수용되면서 목돈을 만진

마을 사람이 생겼고     

고개 너머 동네는 고속도로에서 보인다는

이유로 지붕과 벽에 뺑끼 칠을 했고     

새마을 사업과 더불어 초가집,

흙벽돌집들은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로 일순 바뀌었다.     


수백 년 조용하던 마을이 잠에서 깬 것이다.     

이곳 경안천을 중심으로 더러운 폐수와 매캐한 매연을 뿜는 공해공장이 서울에서 옮겨왔다.


고속도로로 교통이 편리해지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온 손님들은 서울에서

쫓겨 난 공해유발 공장들이었다.     

피혁공장, 제지공장, 화학공장이

하천 좌우로 들어섰다.     


새마을운동은 지붕을 개량하고

퇴비증산을 하게 해 주었지만     

실제로 경제적 효과를 안긴 건 이들 공장들이었다.     

마을은 윤택해지기 시작했다.      


하천 안쪽으로는 섬유,피혁,기계같은

노동집약형 공장들이 들어서니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밀려들어오고     

동네마다 집을 개조해 작은 방을 짓고 세를 주었다.     


공순이, 공돌이 누나, 형들이 우리 집과

옆집에 살림을 차렸고     

젊은 동네 청년들은 공장 나가서 돈을 벌었다.     

고려피혁 공장. 독한 가죽 냄새와 씨름하며 일하던 가장들이 잠시 밥 먹고 담배 한 대 피워 물던 휴식처이자 구내식당이다.


왁자지껄, 조용한 산골마을은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좋아졌을지라도     

산과 들은 그 반대였다.     


제일 먼저 폐해를 몸소 느낀 건     

마을 꼬맹이들이었다.     

처음엔 피부 트러블로 시작되었다.     


폐수로 개천이 썩어     

멱감던 아이들에게 피부병이 생긴 것이다.     


향그러운 잡목과 수풀이 우거진 뚝방을 따라

펼쳐진  수영장 겸 놀이터, 고기잡이 터전은

몇 년 새 죽음의 하천으로 변했다.     


민물고기 잡는 데는  자칭 타칭 최고의

손잡이들인 동네형과 동생들은     

모기에 뜯겨 가며 이상한 냄새나는

하수구에서 메기 수십 마리를 잡아 왔다.     

아마 그때가 아이들이 개천과 지류

개울을 드나들던 마지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피라미, 불 거지, 똥꼬, 모래무지도,     

한여름 그믐밤에 멱감던 누이들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래도 유순한 성격 탓에     

마을 인심은 그렇게 사나워지지 않았다.     


다소 얼마간의 갈등과 벼락부자들의 행태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일요일이면 낫과 삽을 들고나가

동네 앞길을 청소하는 부역도 여전했고     

품앗이 농사일과 경조사도 예나 그때나 똑같았다.     


깡통차기와 술래잡기, 고무줄놀이로

하루 종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마을회관과      

창식이 형네 집 앞마당은 초라한 풍경으로 남았다.     

창살에 녹이 선연한 작은 방 창문들은

과거 공장 사람들이 세를 살던 방들이었다.      

정면이 마을회관이고 그 앞에서 깡통차기를 비롯해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마을은 그러나 내부로부터 병들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농한기 때 새끼를 꼬는 대신

마을 슈퍼에서 소주로 매일 술판을 벌였고     

갑자기 들어온 그놈의 돈 때문에 형제자매가

싸우고 가정이 파괴되었다.     


30여 년 전 찍은 동네 사진. 연기 나는 곳이 본드를 만들다 나중에 공구를 만들던 오공금속이다. 소음으로 한동안 시달렸지만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곤 했다.

   

동네 땅이란 땅은 모조리 서울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고     

검은 세단이 가끔 들락거렸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하나 둘 동네를

떠나는 사람들은     

쉽사리 고향을 찾지 못했다.     


7,80년대의 그악스러운 공장 시대가 마을을 살렸고     

또 망하게 했다.     


역시 서울을 떠나 우리 동네로 왔듯      

공해공장들은 하나둘씩 중국으로

다른 시골로 떠났다.     


그 많던 노동자들도 떠나고      

동네 인구도 3분의 1로 줄었다.     


원주민은 이제 아홉 가구 정도밖에 안 남고

외지인들이 빌라과 원룸으로 채워지고 있다.   


동네가 좁아 놀이터가 될 수밖에 없던

뒷동산 잔디밭은 잡초와 수목이 우거졌고     

아이들 웃음소리도 끊겼다.     

 

마을 이장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스피커와 축구장, 추석 특설 콩쿠르 무대가 있던 뒷동산은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었다.


뉘라서 이 아름답고 순해빠진 동리 사람들과

모습을 기억할 것인가?   

애향가가 아니라 망향가인가...  



작가의 이전글 여로(旅路)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