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 일기 2 >
구약 성경의 욥기를 읽을 때마다 참 힘들다.
예전에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이러시지?’라는 의문점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욥기를 읽으면서 솔직히 ‘감사하다’라는 마음이 선뜻 들지는 않는다. 감사함보다는 욥기를 읽는 내내 무겁고 힘든 건 사실이다. 단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의 히브리어 이름의 뜻은 ‘고난당하는 자’이다.
그는 그의 이름대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한다. 성경에서 말한 대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동방 사람 중에 가장 부자. 다복한 가정을 이룬 자’이다. 세상의 복은 다 누리고 살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고난이 닥쳐온다. ‘고난’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고난으로 그는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다 잃고 만다. 그것도 다름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특수교사를 할 때이다. 장애아들을 돌보면서 장애아들보다 더 마음이 갔던 것은 그들의 부모였다. 장애아들은 오히려 해맑고 천진난만하지만 그들의 부모는 그렇지 않았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었고, 웃음을 찾아보기가 드물었다. 예전에는 업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많았다. 그래서 함부로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저런 아이를 낳았을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다행히도 요즘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잘 볼 수 없다).
과연 그럴까?
욥에게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가 찾아와 욥에게 온갖 비난을 쏟아낸다. “네가 죄를 지어서 그런 거다.”라고. 그러나 성경 말씀 속에서 그는 누구보다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최고의 고난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고난’...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다.
욥기를 읽으며 예수님의 고난이 겹쳐졌다.
예수님 또한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았다.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쾅쾅 못을 박고 십자가에 매달았다. 손톱 끝에 자그마한 가시 하나도 너무 아픈데 예수님께서는 가시면류관과 채찍에 살이 찢기고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 무섭고 두려운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장 34절)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앞에 놓인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원망하기보다는 우리를, 아니 나를 생각하셨다.
삶을 살아가면서 예수님만큼, 욥만큼 고난을 겪지는 않지만 우리 인간의 삶 또한 만만치 않음을 고백한다. 때론 나의 잘못으로 오는 고난도 있지만 전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도 있다.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있을까?’라고 되뇌어보지만 답을 알 길이 없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님들이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다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
하나님의 주권, 모든 것들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
욥의 고백처럼 나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 가신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오늘도 할 수밖에 없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리라(욥기 1장 21, 22절)
예수님의 기도처럼 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오늘도 기도할 뿐이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누가복음 22장 42절)
https://youtu.be/zjHxhlLV9xc?list=RDzjHxhlLV9x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