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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려놓기 Jul 26. 2016

태양의 도시, 공중 도시, 그리고 잃어버린 도시

쿠스코, 마추픽추 2015년 7월 10일

1만 5000년의 세월 동안 지구에는 '완전히 분리된 두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구세계’의 역사가 양치기의 역할에 의해 규정됐다면, ‘신세계’ 쪽은 주술사에 의해 좌우됐다.


1만 5000년 전 인간이 처음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콜럼버스가 상륙하는 15세기까지 지구는 ‘완전히 분리된 두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발생해 진화한 현생 인류의 작은 집단이 아프리카를 떠나 인류 최초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 집단은 5,000명 정도에 불과했고 지구 상의 모든 비아프리카인들은 이 집단의 후손이다. 인간은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연결하는 ‘베링 육교’을 걸어서 새로운 땅에 들어섰다. 


그 이후 긴 시간 동안 두 집단의 교류는 바이킹들의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었다. 단절된 두 거대한 땅덩어리는 기후와 지리, 생물학적 환경의 차이를 만들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그 인류 문명의 불균형을 설명했다. 유라시아의 동서(횡) 지형이 아메리카의 남북(종) 지형보다 훨씬 더 문명 발전에 유리했고 가축 사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피터 왓슨은 '거대한 단절'이라는 책을 통해 그 원인으로 엘니뇨와 가축, 환각성 식물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이야기한다. 


태평양 한편의 몬순은 비를 내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만들게 하고 점차 인도와 중국 문명을 낳게 하였다. 하지만 태평양 반대편 남아메리카에는 몬순 대신 엘니뇨가 있었고 이는 극단적인 가뭄과 폭풍우를 가져왔다. 여기에 태평양 판에 위치한 탓에 남아메리카는 극심한 지진과 화산활동이 벌어졌다.


유라시아는 다양한 곡물 재배가 가능했지만, 아메리카는 감자와 옥수수뿐이었다. 곡물은 보관과 교환이 가능하지만 감자는 ‘잉여’라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육이 가능한 다수의 포유동물이 살았던 유아시아와 달리 아메리카는 야마 정도만 있었다. 쟁기질과 말타기가 없었고 수레를 끌어줄 수가 없었다.


양귀비와 대마에서 시작해서 상대적으로 순한 알코올로 옮겨간 유라시아에 비해 남미는 담배, 코카, 초콜릿 등이 샤머니즘적 의식들과 결합하며 더 강력한 환각제로 변화했다. 쓰나미와 지진, 화산 등의 끊임없는 위협을 신의 분노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신을 달래기 위한 희생의 강도를 높여갔다. 그들에게 죽음은 종말이 아니었고 희생 의식도 잔인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각제와 함께 하며 고통 자체가 종교적 체험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도 언급한 금속의 유무였다. 유라시아에서 흔한 철이 그곳에는 드물었다. 구리는 있었지만 구리의 강도를 보강할 주석, 아연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런 차이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발전한 유라시아와 달리 아메리카는 일부 장신구를 제외하면 석기시대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피터 왓슨은 '거대한 단절'이라는 책의 결론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문명은 환경 적응의 산물이다. 양쪽의 주요한 차이는 서로 다른 환경적 조건에 따른 적응의 결과이다. ‘구세계’의 역사가 양치기의 역할에 의해 규정됐다면, ‘신세계’ 쪽은 주술사에 의해 좌우됐다.”


쿠스코는 인근 수천 km의 영토를 지배하던 대제국 잉카의 수도였다. 그들은 더위와 쓰나미를 피해 고산에 정착하고 거주했던 사람들이다. 고산에 적응하고 고산에 동화되어 살아왔다. 마추픽추의 칼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성벽보다는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 한국의 다랭이 논과 비슷한 경작지가 그들의 힘든 삶을 느끼게 한다. 부족한 철기를 무기가 아닌 농기구에 더 할애한 것은 그들의 삶이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하게 하는 단면인 듯하다. 


마추픽추는 발견될 때까지 수풀에 갇힌 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다. 공중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여 우주적 차원의 문명 작품으로까지 불리는 곳이다. 그러나 분명 잉카의 땅이며, 과거 잉카의 고도인 곳으로 제국의 마지막 성전이 벌어지고 그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을 함께한 곳이다.


오래전 피사로의 병사 168명과 잉카군 8만의 전쟁이 있었다. 사람들은 잉카의 최후를 안겨준 것이 몇 시간만에 끝난 단 한 번의 전쟁으로 기억한다. 무려 36년의 게릴라전과 저항과 그들의 모든 문자 기록을 태워 버리고 이민족과의 혼혈을 추진한 문화 말살 정책은 기억되지 않는다. 


이제는 스페인 식 건물만 남아 있는 쿠스코의 거리가 안타깝다. 미개한 민족이라서 복속당하는 것이라는 제국주의의 논리는 어쩌면 우리의 사고에도 깊숙이 깔려 있다. 언젠가는 만날 외계 문명에 비교하면 어떨까?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유럽과 아메리카의 차이보다도 더 큰 차이의 미개 문명 일지 모른다.


미개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라 생각하길 바라여 본다.


머나먼 마추픽추에 도착했다.
마추픽추는 쿠스코에서 1박 2일의 투어를 통해 방문할 수 있다. 기차를 이용하면 비싸지만 빠르고 버스는 위험한 산길을 달려야 한다.
마추픽추의 한 쪽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돌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마추픽추는 아직 미완성 상태이다.
태양의 신전
춘분, 추분 때의 첫 햇살이 태양의 신전 창문을 비춘다고 한다.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르키는 표지석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3개의 창문을 통해 비추는 햇빛이 물에 걸치는 정도에 따라 절기를 계산했다고 함
가파른 산에 만들어진 계단식 경작지
도시의 예전 출입구였던 작은 통로
콘도르 신전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물이 흐르는 샘의 계단
안데스의 또 다른 얼굴 알파카
예전 모습을 재현해 놓은 오두막의 내부
마추픽추 가는 길에 보이던 설산
쿠스코의 잉카 박물관
철기가 사용된 농기구는 드물지만 발견되고 있다. 무기에는 철기를 쓰지 않았다.
생각 보다 큰 쿠스코 시 - 3,400미터의 고지대다.
아르마스 광장과 성당
밤이면 아르마스 광장이 빛난다.
아르마스 광장의 시위 - 화형식까지 하는 것을 보니 화가 많이 나신 듯하다.
경찰들은 호위만 한다.
길거리의 공연이 많다. 가장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던 섹소폰 연주자.
야마
쿠스코 뒷동산 투어를 함께 한 엘칸토 - 성질 급한 녀석이라 선두로 나가고 싶어 길이 아닌 곳도 마다하지 않는다.
쿠스코 뒷동산 풍경 - 하지만 백두산 보다 높다.
삭사이와만 유적
성벽에 정말 틈이 없다.
마추픽추를 다녀오는 길에 해가 저문다. 왠지 저 일몰에 잉카인들의 마음이 담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쿠스코의 숙소에도 세월호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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