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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Jan 11. 2024

임용고시 모의수험생의 하루

1일 디지털 디톡스 후기

다시 한번 임용고시?


 임용고시는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국가고시이다. 특히 허수가 없는 살벌한 시험으로 악명이 높다. 1차 시험에서는 교육과정 전반을 다룬다. 지필 시험을 통과하면 실전이다. 2차 시험에서는 일반 교과목 및 영어 수업을 실연한 뒤 교직 적성 심층 면접을 치룬다. 2차는 말 그대로 무한 경쟁의 장이다. 1차에서 1.5배수의 합격자들을 뽑았기 때문에 무조건 탈락자가 나온다. 2차는 지역마다 시험 방법이 다르다. 경기도에서는 수업실연과 토론을 친다면, 경북에서는 수업실연과 지도안을 작성한다. 그래서 결국 같은 지역을 지원한 경쟁자들끼리 스터디를 함께 하는,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되는 잔인한 아이러니를 겪게 된다.


 2차 시험 문제는 교감 선생님 또는 교수님 몇 분이 감금된 채로 출제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내가 현역일 때만 해도 각 교대별로 특공대가 활동했다. 갑자기 사라진 교수님을 찾아 그들의 전공을 공유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험 문제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구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문제가 잘 만들어졌는지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친다. 출제자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는지, 오해를 살 만한 요소는 없는지, 제시문을 읽고 개념이 바로 연상되는지 등 다양한 방면에서 검증이 필요하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였다. 나는 1일 모의수험생이 되었다.

 

모의수험생의 하루


 국가고시라는 명성에 걸맞는 보안이었다. 모의수험생은 100% 섭외로 구성되는 것 같았다. 그 과정부터 특이했다. 각 교실에는 교육청 내선 번호를 사용하는 유선 전화기가 있다. 업무 관련 연락은 모두 이 전화로 온다.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기분 좋게 집 앞까지 왔는데 개인 휴대폰에 갑자기 교육청 번호가 떴다. '아, 이거 학교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쭈글거리며 받아 보니 모의수험생을 구한다는 연락이었다. 작년 합격자도 아닌데 무슨 연유로 뽑힌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기밀이라는 이유로 묻혔다. 기일이 다가와도 별 다른 안내가 없었다. 세면도구를 챙기라는 문자만 날아왔다. 1박 2일 일정임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행선지도, 출장비 유무도, 언제 마치는 지도 알 길이 없었다.


 가장 난감했던 순간은 복무를 상신할 때였다. 교사들은 학기 말에 하루 날을 잡아서 방학 중 복무를 한 번에 상신한다. 방학에는 주로 41조 연수를 쓰고 집에서 원격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근무시간 중에는 자택을 벗어날 수 없다. 근무시간 중 학교에서 연락하면 그 즉시 출근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처럼 출장을 가는 경우, 특히 연락이 닿지 않을 경우는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 사전에 말씀드려야 한다. 나는 출장을 가긴 하는데, 출장의 이유는 극비라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또 얘기하고 싶다고 한들 나 역시 대체 내가 어디를 가는지, 가서 뭘 하는지도 몰랐다. 복무를 어떻게 상신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찰나, 내가 ‘미래교육 관련 포럼’에 참석한다는 공문이 도착했다. 아뿔싸. 내가 미래 교육에 관심이 있었구나? 역시 교육청, 일을 기똥차게 잘한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교육청에 도착했다. 동시에 휴대폰을 제출했고, 나는 알 수 없는 곳으로 옮겨졌다. 모의수험생이 머무르는 객실은 출제자 객실과 아예 층까지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심층면접 모의수험생이라 심층면접일에 격리가 해제되는데, 그전에 혹여 수업실연 문제를 들을까 분리한 게 아닐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수색이 이뤄졌다. 짐 가방과 몸까지 수색을 마친 뒤 겨우 객실 키를 받았다. 방에는 전화는 있지만, 수신기는 없었다. 그들의 치밀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옷가지를 간단하게 정리한 뒤 곧바로 2024학년도 임용 문제를 풀었다. 실제 수험생처럼 문제를 풀고, 답안 녹음도 하다 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문제에 대한 협의회까지 마친 뒤 한숨 돌리니 저녁 7시. 그때부터 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디지털 디톡스의 힘


 “호캉스 시작입니다. 푹 쉬세요. 다만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의심받을 수 있어요.”

 장학사님은 이제 고생 끝이라며 푹 쉬라고 하셨다. 휴대폰 없는 호캉스라니! 지난 며칠 동안 저녁 식사 후에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식사 후 방으로 돌아왔을 때 객실에 깔린 적막함이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이내 <도파미네이션>에서 저자 에나 램키가 시도했던 디지털 디톡스가 떠올랐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나도 에나 램키 처럼 도파민 덩어리들에서 멀어진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1. 온전한 집중의 힘


 끊임없이 재생되는 릴스, 잔잔하게 재생되어서 소음인 줄도 모르고 살았던 음악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그러자 회색 풍경의 살아있는 소리가 들렸다. 도로에서 들려오는 경적음,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깔끄럽지 않고 듣기 좋았다. 풍경의 색감이 살아났다. 소리의 발원지에 대한 진정한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왜 지금까지는 손바닥만 한 작은 화면 속에서만 살았을까.


 2. 필사의 힘 


 부쩍 짧아진 집중력 탓에 책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타이핑을 하곤 했다. 언젠가부터 기록하지 않으면 책을 읽지 않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은 책, 멀티펜 한 자루와 수첩 한 권이 전부였다. 인내심을 갖고 한 글자씩 눌러썼다. 그런데 수첩을 닫아도, 책을 덮어도 그 문장이 떠올랐다. 이게 필사의 힘인가 싶었다. 글쓰기 훈련을 할 때 활용해 볼 생각이다.


3. 아날로그의 힘


 아침 8시에는 무조건 관리요원과 함께 아침 식사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늦잠을 자서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알람을 맞춰야 했다. 하지만 아날로그시계는 처음이었다. 1학년 수업 중 사용하는 모형 시계가 내 인생 아날로그시계의 전부였다. 한참 고민하다 장학사님이 계신 방문을 두드렸다. “아, 선생님은 이 세대가 아니시군요.”하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조그마한 태엽 기계의 파워는 가히 대단했다. 쩌렁쩌렁한 소리를 듣고는 도무지 꾸물거릴 수가 없었다.



 

1일 천하


 자동으로 재생되던 숏폼에서 벗어나니 하루가 명료해졌다. 알고리즘대로 끊임없이 영상들을 보다가 해야 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휴대폰을 닫던 평소와 차원이 다른 개운함을 느꼈다. 겨우 몇 시간인데 작은 변화가 느껴졌다. 휴대폰을 찾으려 허공을 휘젓는 빈도도 줄어들었고, 막연히 누군가에게 답장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불안함도 줄었다. 처음 느꼈던 적막이 곧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해방감으로 변했다.


 하루 만에 현생으로 돌아온 게 아쉽다. 나는 급속도로 도파민 덩어리에 가까워졌다. 유튜브는 배경 음악처럼 재생되고 있어야 할 것 같고, 어디선가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자력으로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에 처한 어느 날 오늘을 떠올릴 것 같다. 그때도 책과 펜, 그리고 수첩만 챙겨 훌쩍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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