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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길 Feb 01. 2024

아이의 준비물을 챙기며

그 시절의 엄마

  2023년 육아 휴직 후 8살 아이의 등하교 시간이 내 일상의 기준이 되었다. 하교 시간, 아이들이 교문에서 쏟아져 나왔다. 많은 인파 속에서도 내 아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활짝 웃는 얼굴로 양손을 크게 흔들며 내게 달려왔다. 한 손에 귀여운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렸다. 집에서 챙겨간 나무젓가락 끝에 나비 모양으로 자른 색종이가 곱게 붙어 있었다. 아이가 젓가락 아래를 잡고 옆으로 눕히더니 젓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비가 팔랑팔랑 날개를 움직였다. 

  “와, 멋지게 잘 만들었네.”

  아이가 학교에서 만든 작품을 처음 챙겨 왔다. 교실 책상에 앉아 저 작은 손으로 조물조물 무언가 만드는 모습을 상상하니 미소가 절로 났다.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윤아야, 더 챙겨간 나무젓가락 말이야. 필요한 친구들 나눠 줬어?”

  전날, 삐뚤빼뚤 힘주어 쓴 아이의 알림장에 ‘준비물: 나무젓가락 1개’를 봤다. 한 개면 된다는 아이에게 안 들고 온 친구 나눠 주라며 젓가락 한 뭉치를 더 챙겨 보냈던 터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배운다더니 내가 그런가 보다. 


  어머니는 늘 학교 준비물을 넉넉히 챙겨주었다. 말수도 없고 순했던 나는 우리 아이처럼 ‘하나면 되는데 왜 챙겨주냐’고 묻지도 않았다. 교실에는 늘 준비물 챙기지 못한 친구들이 있었다. 여분의 준비물은 살뜰하게 쓰였다. 준비물을 건네받은 친구는 ‘고맙다’ 했고, 나는 그 말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와 동네가 달라 모든 것이 낯설었다. 급식이 없던 시절, 엄마는 도시락에 공을 들였다. 늘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의 반찬을 준비했다. 내 도시락 가방은 책가방만큼 묵직했다. 

  “친구들이랑 같이 먹어.” 

  도시락 덕분에 점심시간을 많이 기다렸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나와 친구들은 앞뒤 책상 4개를 이어 붙여 금세 큰 밥상을 만든 후 의자를 끌고 왔다. 준비 완료. 각자의 반찬 통을 열면 평범하지만, 푸짐한 한 상이 뚝딱 차려졌다. 고소하고 매콤한 냄새들이 교실을 가득 채웠다. 내 도시락은 친구들 것의 두 배는 족히 되었다. 어머니가 자주 해주던 카레는 친구들 밥그릇마다 듬뿍 덜고도 남았다. 오징어 모양으로 곱게 칼집을 내어 익힌 소시지는 큰 죽통을 꽉 채워서 친구들 밥그릇에 몇 개씩 돌아갔다.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의 일이다. 엄마 계 모임에서 일본 여행을 갔다. 나와 동갑인 딸들이 동행했다. 백 엔 샵에 들러 아기자기하면서도 저렴한 물건들에 신기했던 게 기억난다. 그곳에서 나는 아이스크림콘을 샀다. 연한 딸기 우유색에 무지개 가루 토핑이 올라가 있었다. 시간에 맞춰 구경을 끝낸 뒤 관광차에 올라탔다. 각자 산 물건과 먹을거리들을 뜯으며 신이 났다. 친구들은 산 것들을 정리해서 가방에 쏙 넣었다.

  “나도 좀 먹어보자.”

  “나도~!” 

  아이스크림콘을 산 건 나뿐이었다. 뜯자마자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6명의 입을 경유 했는데도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이제 남은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일만 남았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내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그걸 왜 돌려. 너나 먹지.”

  어머니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가시 돋친 말을 나에게 쏘아붙였다. 짙은 쌍꺼풀은 접힌 미간 때문에 더 깊게 패어 자글자글 주름이 졌고, 윗입술 한쪽이 한껏 올라갔다. 당황스러웠다. 친구들과 아이스크림 나눠 먹은 게 여행지에서 인상까지 쓰면서 화낼 일인가. 마음이 상했다. 엄마와 나는 그날 내내 떨어져 걸었다. 방학 맞이 3박 4일의 여행 중 3분의 1이 그렇게 지나갔다.

  ‘매번 가진 걸 나누어 주라더니 위선적이야.’

  그날 이후로 엄마가 챙겨주는 수북한 도시락 반찬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남을 위해서 한다는 엄마의 행동들이 모두 다 거짓처럼 보였다.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면서 부모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사실 어머니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딸의 학교생활을 염려했던 거다. 6살처럼 보이는 작은 체구에 새로운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으려고 해서 늘 실랑이하는 딸이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했다. 다른 친구들에게 절대 먼저 말 붙이는 법 없고, 여느 딸처럼 수다스럽게 하루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아 불안했다. 어떻게 하면 딸이 또래들 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을까. 

  어머니는 딸 만을 위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도움을 주는 자리에 있게 하자.’ 마음먹었다. 아이의 학교 준비물을 더 챙겨주었다. 새로운 환경에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던 딸은 그 덕분에 친구들 틈에 안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학교에선 말 한마디 먼저 걸 줄 모르던 아이는 점점 ‘착한 친구’라는 평판을 얻었다. 

  딸은 여름 방학 기간이 생일이라 생일파티를 해 본 적 없었다. 6학년이 되어 큰마음먹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일을 앞당겨 파티를 열었다. 반 친구 모두를 초대한 큰 파티였다. 어머니는 중화 요리점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직접 닭을 튀기고, 김밥과 떡볶이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제시간에 맞춰 하나둘 도착하자 딸만큼 어머니의 얼굴도 환해졌다. 거실 한쪽에 커다란 인형과 꽃다발, 예쁜 문구류와 편지들이 쌓였다. 방방마다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 주위로 아이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그날, 딸에 대한 근심 걱정은 훨훨 날아갔다.

  다만 나눔에 대한 어머니의 열정은 그 이후로도 지속되었고, 나는 그 시간만큼 나누어 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어려운 이웃을 향한 나눔’보단 ‘자식의 생존과 적응’이 더 중요했을지 모르겠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매해 아들, 딸의 생일이 다가오면 어린이집에 보낼 생일 축하 답례품을 고민한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나눠 주라며 아이 친구들 것도 챙긴다. 나누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았으면 하는 마음 한편에 우리 아이의 생존과 적응을 염려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다.      

  “친구들 다 챙겨 왔어. 준비물 안 챙겨 온 친구 없었어.”

  아이의 말을 들으며 내심 서운해서 혼자 민망하다. 여분의 준비물을 챙겨주던 엄마와 “자기 것도 못 챙기냐”며 핀잔주던 과거의 엄마는 지금의 나와 닮았다.

한 시절의 미웠던 엄마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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