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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길 Jan 12. 2022

초등학교 입학식, 나는 전교 1등이었다.

작은 키의 긴 여정

새로운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크고 입이 짧았던 나는 유치원에서 나오는 점심밥을 안 먹고 버티기 일쑤였다. 엄마는 그런 내가 걱정이 되어 유치원에 몰래 찾아와서 감시 아닌 감시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다만 중학생이 되어서도 아침밥 먹이기에 집착하는 엄마가 부담스러웠다는 정도의 감정만 남아 있다. 나는 또래에 비해 아주 일찍 잠을 자는 학생이었기에 늘 내가 할 공부가 있으면 새벽 시간을 이용했다. 새벽 공부 목표량을 맞추기 위해선 엄마의 아침밥 호출에 늦게 응하는 경우가 잦았다. 엄마의 목표는 늘 공부보다 밥이었기에 엄마는 아침부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아침밥을 대하는 엄마와 나의 온도차는 극심했다. 엄마는 내가 지각을 해서라도 아침밥의 정해진 기준치를 먹고 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실제로 중학교 시절, 밥 때문에 학교에 지각한 적이 있으니 엄마의 으름장은 그냥 으름장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할머니가 된 엄마의 아침밥 집착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이러한 집착이 생겨난 데에는 나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기에 한편으론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 입학 당시 나는 키로 전교 1등이었다. 큰 순서이면 좋겠지만 작은 순서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이 전혀 기억나지 않으며 단지 친구들이 나보다 컸다는 것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한 마디로 나는 내 키에 대해 그 어떤 편견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한창 성장판 검사가 유행이었고 뼈를 잘라 인위적으로 뼈를 늘리는 수술이 매스컴을 탔다. 또 어떤 교양 프로그램에서 성인이 된 연예인이 키를 키우는 운동을 통해 키가 자라는 과정을 다루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작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지만 그 믿을 수 없는 결과도 믿고 싶을 만큼 절실했던 거겠지. 내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에 엄마는 두 눈을 반짝였고 두 귀를 활짝 열었다. 내가 작은 키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엄마는 엄마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랑귀 여사'가 되었다. 

먼저 나는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 때쯤 성장판 관련 검사를 받았다. 내 기억으론 손 사진을 찍었던 것 같은데 유년의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담당 선생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엄마, 아빠가 이 키인데 현재 아이키가 이런 것은 어머님 말씀처럼 어린 시절 영양 결핍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늘 100프로 확신이 아닌 가능성을 열어두고 말을 한다. 내 유년은 음식에 대한 거부로 인해 실제 영양결핍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내 키가 ‘비정상적’이라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성장판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엄마는 TV에 나오는 키크기 수술도 심각하게 고려하는 듯했다. 하지만 뼈 사이를 벌린 후 호르몬제를 투여해서 인위적으로 뼈를 키운다는 게 이론만큼 정확한 결과를 얻어낼 순 없지 않은가. 실제 수술을 감행한 사람들은 내 눈엔 꼭 임상실험체처럼 보였고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들에게도 고통과 실패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하지만 그보다 더한 ‘절박함’이라는 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싫었다. 아직 키가 클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가장 중요한 절박함이 나에겐 없었다. 키 작은 불편함보다 내가 왼손잡이라는 게 더 불편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 사람들을 보는 엄마의 마음도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다행히 성장판 검사 결과, 나는 내 또래에 비해 2-3년이 더 늦게 닫힐 것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엄마와 나는 안도했다. 그날 엄마가 무척 행복해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듣고 엄마와 나는 기쁜 마음을 안고 63 빌딩에 갔다. 그 당시에도 서울의 하늘은 뿌얬고 높이 선 건물들의 일부분이 먼지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날 63 빌딩에서 <백상어> 영화를 보았다. 화면을 가득 채운 백상어가 허옇고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나에게 다가오던 장면에 더해진 음악이 아주 음산했다. 

검사 결과를 듣고 나서의 엄마는 2-3년 안에 자연스럽게 자라게 될 내 키를 그냥 두고 싶어하지 않았다. 

“평생 키 작으면 불편한 게 얼마나 많은지 아니? 성장판이 닫히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자랄 수 있게 노력해 보자.”

엄마는 TV 교양 프로그램에 성인 연예인 키를 자라게 했던 운동 센터에 연락을 시도했다. 나처럼 키 때문에 고민인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방송을 탔던 운동센터에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몇 번은 엄마와 함께 동행했다. 서울까지 거리도 만만치 않았기에 버거웠다. 이 센터에서는 나처럼 방문이 어려운 고객들을 위해 운동 비디오를 제작해서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비용에 대해 정확히 들은 바는 없지만 고가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집에서 그 비디오를 보며 연습하고 일정 시기가 지나면 서울에 방문하는 구조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면 계속 다녀봤을까. 나에겐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엄마도 지방에서 서울까지 많은 비용을 지불한 만큼 기대했던 성과가 나오지 않자, 금방 센터에 대한 신뢰감을 잃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절박한 사람들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엄마의 노력 덕분일까. 아니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밥을 잘 먹게 된 덕분일까. 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입학했던 나는 반에서 2-3번째 키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큰 순서가 아닌 작은 순서로. 전교 1등에서 반 2-3등은 아주 큰 발전 아닐까.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또래보다 늦게 닫히는 성장판에 희망을 가졌다. 엄마의 바람과 기도대로 나는 중학교 입학 후에도 다른 또래들에 비해선 키가 무럭무럭 자랐다.

중 3말, 나는 또래보다 늦은 초경을 맞이했는데, 그때 나는 내가 무슨 병에 걸린 줄 알았다. 짧은 기간 안에 시대가 그렇게 많이 변했나 싶기도 할 정도로 그 당시엔 제대로 된 성교육이 가정에서건, 학교에서건 이루어지지 않던 때였다. 더군다나 나도 특별히 여자의 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던 중학생이었다. 나는 그날 아침에 깨어 화장실에서 초경을 목격하고 한참을 걱정했다. 심각한 병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는 내 말을 듣던 엄마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엄마는 등교하는 나에게 '패드'라는 것을 챙겨주셨다. 초경이어서였을까. 수업 시간 내내 미칠 듯이 아픈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생애 처음으로 양호실이라는 곳에 가서 침대에 누워있는 호사도 누렸다. 

힘든 몸을 이끌고 집에 온 날, 아빠가 꽃다발과 케이크를 선물해 주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인가' 싶었는데 ‘이제 엄마가 되는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부모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부모가 되고 보니 자녀의 일이 내 일 같을 때가 있다. 아마도 부모님은 언젠가 생리를 시작하게 될 딸을 위해 어떤 이벤트와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내 키는 많이 컸을까. 분명 크기는 컸다. 하지만 조금씩 자라던 내 키는 결국 성장판이 닫히면서 멈추게 되었다. 지금 키는 158cm이다. 작은 키인가? 물론 누군가에겐 크고 누군가에겐 작은 키겠지만 나는 전혀 작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키가 작아서 불편한 적은 거의 없다. 여전히 왼손잡이인 게 더 불편할 따름이다. 

고학년 교실에는 교사인 나보다 한 뼘도 더 큰 아이들이 내 곁에서 키재기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키에 대한 열등감이 없어서일까. 마음이 쓰이진 않는다. 한 친구가 다가와 키 이야기를 한다.

“선생님~ 선생님 키 몇이에요? 이제 선생님보다 제가 더 크겠어요.”

이 때다 싶어 나는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을 준비를 한다. 

“얘들아~ 선생님은 선생님 키가 마음에 들어. 세상엔 작은 사람도 있고 큰 사람도 있잖아? 내 외모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게 불편할 수도, 불편하지 않을 수도, 좋을 수도 , 싫을 수도 있어. 원래 선생님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전교 1등으로 작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이만큼이나 자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또 어쩌다가 이만큼밖에 안 컸을까요? 궁금하지 않나요?"

금세 귀를 쫑긋 세우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에게 내 10대의 경험은 늘 쓸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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