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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길 Nov 13. 2021

아무리 대단한 인간도 결국 아픈 몸으로 살게 된다.

겸허히 삶을 살아내기

 20대 큰 수술 후 1년에 1~2번 수술 후유증을 겪곤 한다. 재작년은 유독 크게 아파 부산대 대학병원에서 시술을 받고 장기간 입원까지 해야 했다. 병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은 환우들을 만났다. 내과였기에 대체적으로 항암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시는 분들도 계셨다. 

나는 밤마다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서럽게 우는 연세 지긋하신 어른들을 마주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음식들을 꾸역꾸역 삼켜야 했고 때가 되면 온갖 검사를 하러 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의사의 회진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두려워했고 검사 결과나 몸 컨디션에 하루가 좌지우지되었다. 고통을 견디며 희망을 품었고, 자주 좌절했으며 다시 살고 싶어 했다.


크게 아파 병원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새벽까지 통증에 잠을 청하지 못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을 청하는 하루. 그런 날들은 늦게 청한 잠으로 오전 시간이 비몽사몽 간으로 지나가 버린다. 아픔이 덜 할 때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최대한 지루하면서도 편안하게 시간을 흘려보낸다. 고통과 싸우는 치열한 공간이지만 지독하게 더디게 지나는 하루 중, 그나마 같은 병실의 환우들과 대화를 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젊은 편이었던 나에게 환우들은 살면서 깨닫게 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해 주셨다.


“자기가 제일 중요한 거라. 가족이고 자식이고 내가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지. ”


“나도 직장 생활하고 아이들 키우며 몸 못 돌보며 아주 바쁘게 살았는데 참 후회가 되네요. 00 씨는 몸도 약하니 자기 건강 잘 챙겨요.”


“남편 일찍 죽고 아들 둘 키워놓고 나니 이 나이에 암이란 게 찾아와서”


“차곡차곡 정리해야지 재산도.”


나는 ‘삶을 살아냄’ 그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환우들을 보며 배웠다.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인생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떠올려 본다.


내가 퇴원하기 1주일 전쯤, 우리 병실에 아주머니 한 분이 새로 오셨다. 그분은 20대의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 곱게 늙으신 느낌이었는데 아주 조용하고 따뜻하신 분이셨다. 건강검진으로 대장내시경을 받았다가 암이 발견되어 다른 검사를 해 보려고 입원하셨단다. 이 아주머니는 나처럼 책 읽는 것을 좋아하셨다. 얼굴이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분이셨고 기품이 느껴졌다. 친화력도 있으셔서 금방 병실 환우들과 친해졌다. 폐에 암이 전이되었을 수도 있어 검사를 한다고 하시면서도 딱히 불안해하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폐에 먼저 암이 생긴 상태였고 대장으로 전이된 상태. 담당교수는 아주머니께 시한부 삶을 선고했다.


아주머니께서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시는 날, 우리는 모두 의아했다. 남편이 오지 않고 아들이 왔기 때문이다.


“이리 싱숭생숭한 날 왜 남편이 안 오고~~.”


환우들이 묻자 아주머니는 웃으시며


“우리 남편 오면 더 속 시끄러워요. 같이 있으면 내가 마음이 더 힘들어서.... 그냥 아들이 더 편해요.”


아주머니는 아주 짧은 시간 만에 마음을 추스르셨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담당교수님과 면담 후 아주머니는 아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시는 것 같았다. 아들은 그래도 치료받기를 원했고 아주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싶어 하셨다. 병원에서도 폐의 암 조직을 떼어내어 확인하고 치료가 가능하다면 치료를 해 보는 방법도 있다고 했기에 아주머니는 많이 고민하셨다.


배우자의 시한부 선고가 믿기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우락부락한 성격이신 걸까.

남편이란 분이 찾아와 갑자기 퇴원 수속을 밟자셨다.


“의사들이 말하는 그 검사, 받다가 온 전신에 전이될 수도 있어. 내가 그냥 하라는 대로 해!.”


남편이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치는 통에 간호사들이 병실에 왔고 아주머니는 이런 일이 흔하다는 듯, 달관한 표정으로 그럼 집에 가자고 하시며 차분히 짐을 싸셨다. 부부가 몇십 년을 살아도 어떻게 저렇게 다를 수 있지? 아니, 도대체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신 거지 싶을 정도로 아주머니와 너무나 다른 배우자의 모습에 우리 병실에 있던 환우들은 단박에 아주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 오면 더 속 시끄러워요. 그냥 아들이랑 듣는 게 나아.”


가장 건강해 보였던 환우는 그렇게 며칠 만에 시한부 4 기암 환자가 되어 떠나갔다.



내가 가퇴원을 하고 외래를 보러 간 날이었다. 같은 병실에 계셨던 분 중 두 분이 여전히 퇴원을 못하고 계실 것 같았다. 미역귀가 먹고 싶다던 환우 생각이 나서 친정엄마께 미역귀 무침을 부탁해 반찬통에 챙기고 병원 앞 군밤 두 봉지를 사 들고 갔다.

진료를 본 후 익숙한 병실로 향했다. 두 분은 여전한 자세로 누워계시거나 멍하니 티브이를 보고 계셨다.


“아이고, 00 씨 이런 사람 처음 봤네. 뭐하러 왔니. 이런 거까지 챙겨 들고.. 고마워서 어쩌니.”


나는 그렇게까지 나를 반기시며 고마워하시는 모습에 민망하고 감사했다. 한편으론 안도했다. 삶을 살아내고 계신 것만도 얼마나 대단하고 기적 같은 일인가. 환우들을 통해 퇴원하셨던 아주머니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로비에서 운동하다가 아줌마 만났거든~남편이랑 잘 이야기해서 원자력 병원 가기로 했다네~거기서 치료받아보는 걸로~참 잘됐지 다행이야.”



벌써 겨울이 코앞이다. 

요즘 몸이 좋지 못한 까닭일까.

함께했던 환우들 생각이 많이 난다.

결국은 모두 아픈 몸으로 사는거라며

서로를 위로하던 그 시절 나의 벗들...

그분들 모두 오늘 하루, 같은 하늘 아래

주어진 삶을 꿋꿋이

살아내고 계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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