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구렸다고 해서 끝까지 구릴쏘냐

살랑거리는 햇살과 바람 그리고 사람들의 호의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by ERIN


있잖아요… 그런 거.
막 처음이 안 좋으면 왠지 마지막까지 안 좋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바르셀로나에서 비행기를 놓친 사건은 꽤 충격적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음 비행기를 타긴 했지만, 약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나를 지배했다. 약간 커다란 걱정 돌덩어리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느낌이랄까? 괜히 혹시나 또 비행기를 놓치면 어쩌지 라는 걱정에 바르셀로나 공항에 새벽같이 도착해 노숙을 했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꽤 오랜 시간을 보낸 탓인지 비행기 타기 전에 ‘으슬으슬 좀 추운데?’ 싶던 몸은 착륙 할 때쯤 ‘억! 몸이 너무 아프다’로 바뀌었다.


와 망했다.


사실 나는 온갖 것에 의미를 둔다. 무언가 잘 풀리는 날 내가 무슨 속옷을 입었는지, 어떤 가방을 들었었는지, 어떤 생활 루틴으로 지냈는지 기억했다가 중요한 날 그렇게 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그 루틴을 그대로 따랐다고 해서 잘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젠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초, 연말이면 그 '용하다는 곳'을 찾아가 사주를 보는 편이고, 거기에 (엄청나게 큰) 의미를 두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일이든지 처음부터 잘 풀리면 '아 이건 나를 위한 일이다!'라는 생각에 일을 열심히 하고, 처음에 잘 풀리지 않으면 '아 이건 될게 아닌가 보다'하고 쉽게 포기하곤 한다.


그런 내게 처음부터 비행기를 놓치고, 게다가 감기까지 제대로 걸려버린 그라나다는 첫인상이 그렇게 좋은 도시는 아니었다. 첫발부터 좋지 않은 도시를 여행한다는 건 괜히 힘이 더 빠지고, 지치는 일이었고, 어서 여행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다 지친 상태로 숙소로 도착했고, 숙소에 양해를 구해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했다. 그때 샤워를 하며 우연히 노래가 지오디의 반대가 끌리는 이유였는데, 그 노래가 나의 기분을 180도 바꿔줬다. 불투명한 화장실 창으로 들어오는 그라나다의 햇빛과 아직 체크인 시간이 아닌데도 샤워를 허락해 준 호스텔 직원의 친절함 게다가 처음 들어보는 지오디의 상큼한 노래까지 삼박자가 쾅! 쾅! 쾅! 하고 딱 떨어졌다.


IMG_7182.JPG 어딜 가나 하늘은 파랗고, 맑던 그라나다


그렇게 샤워를 다 하고 머리를 수건으로 툭- 툭- 말리며 숙소 가운데 뻥 뚫린 로비에 앉아 있는데 산들거리는 바람과 약간 따스한 햇빛을 받으니 온 마음이 화- 하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화-' 하는 느낌이란, 약간 목캔디 상큼한 맛을 먹고 물 한잔 꼴깍 한 느낌이랄까? 정신 번쩍! 눈 번쩍!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그런 느낌. 딱 그랬다. 그러면서 긴장감이 풀렸는지 갑자기 배고파졌고, 바로 나가 식당을 찾았다. 다른 여행자들처럼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쌓여가는 여행의 후반일수록 지갑은 얇아져갔고, 일반 식당보다 조금 여유 있게 먹을 수 있는 케밥집으로 향했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도시락 형태의 케밥을 주문하고 계산하려는데, 짜식 아르바이트생이 말을 걸어온다.



헤이 프리티걸! 유아쏘 뷰리플.



여기까진 ‘짜식 도시락 하나만 시킬 건데, 두 개 시키라고 하는 건가? 아 돈 없는데’하고 있었고, 왓윌유두에프터식스피엠? 그리고 두유 워너 해브디너윗미? 에서는 살짝 무서워 '이게 말로만 듣던 오징어배 탑승인가?' 했다. 너무 어렸던 나는 (지금이라면, 외국인 친구 사귀기라는 명목으로 몇 마디 더 했을 텐데) 어색하게 웃으며 있지도 않던 남자 친구랑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쉬워하던 그 아르바이트생은 진짜냐며 몇 번 묻다가 음식값을 계산해 줬다. 괜히 따라올까 무서워(착각도 유분수) 경보 선수 못지않게 빠르게 걸어 숙소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나는 천사의 날갯짓을 발견했다. 분명 케밥이 5유로, 그래서 난 10유로를 줬는데 거스름돈을 받은 손을 펴보니 동전으로 그대로 10유로가 들어 있었다. 짜식,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천사였다니. 젠장 난 사람 보는 눈도 더럽게 없다. 너무나 좋은 날씨와 분위기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람의 호의는 최악의 그라나다를 최고의 그라나다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물론, 조심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내가 여행하던 당시엔 여행자들에게 차를 태워줄 테니 타라는 호의를 베푼 후에, 살인이나 강간 등을 하는 여행자(특히 여성) 상대 범죄가 성행이었다. 조심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저 몸 사리다가 기회를 놓치는 법도 있다는 것)


앞선 일들로 그라나다에 삐져있던 나는 몇 가지 기분 좋은 일에 금세 다시 여행에 활력을 얻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그라나다 여행을 시작했다. 최근 현빈이랑 박신혜가 나와 유명해진 드라마의 배경이기도 한 그라나다는 사실 내가 여행할 때에는 노래로 더 유명했다.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이 노래가 뭔지는 몰라도 들어보면 '아- 이 노래' 하게 된다는 그 노래, 사실 이 노래는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유부녀이자 본인의 제자였던 콘차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인 이후 상심하며 스페인 여행을 하던 중 그라나다에 머물며 만든 노래다. 이왕 궁전을 즐기는 거 역사도 알고, 유명한 일화도 알면 좋지 않을까? 싶어 인터넷으로 한국어 가이드맵과 오디오 가이드를 다운로드하여 알람브라 궁전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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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의 캐슬병은 다시 도졌고, 남들은 반나절만에 본다는 궁전을 나는 아침에 들어가 저녁 늦게 해지는 것까지 보고 나왔다. 근데 또 딱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니다 그냥 구석에 앉아 이 궁전이 활발히 사용되었던 때를 상상하고, 장소의 의미를 생각하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그런 재미로 하루 종일 그 안에 있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미리 입장 시간을 예매해 가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침에 가서 오후 늦게까지 천천히 보는 걸 추천한다. 지금은 알람브라 궁전을 가이드해주는 한국인 가이드 상품도 있는 것 같으니 필요에 맞춰 선택하시길. 그리고 아마 지금 현빈이 나오는 드라마 때문에 내가 여행했을 때 보다 그라나다는 한국인이 여행하기 편리한 곳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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