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의도치 않았지만 항상 스포는 존재합니다.
냉정과 열정사이.
20살 때 봤다면 "아 나도 저런 약속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하고 두 손 모아 감동적으로 봤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10년 뒤라고 해봤자 서른인 스무 살이 아니다. 보는 내내 '하, 참 징하다 둘 다', '그래 괜히 엄한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너네 둘이 빨리 만나라'라는 마음만 간절했다. (나 감성 파괴자인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쥰세이가 얼굴은 참 너무 좋은데 하는 짓이 너무 똥차라 어떻게 뭐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혹시 영화를 보고 너무 감동받아 나와 비슷한 사람의 글은 없나? 하고 이 글을 눌렀다면 그냥 나가도 좋을 것 같다. 남의 달달한 마음까지 파괴할 생각은 전혀 없다.
피렌체에서 유화 복원사 과정을 수련 중인 쥰세이는 오래전 헤어진 연인 아오이의 소식을 듣게 된다. 조반나 선생님의 추천으로 모두의 관심과 부러움 속에 치골리의 작품 복원을 맡게 되지만 아오이를 만나기 위해 밀라노로 향하는 쥰세이. 그러나 그녀 곁엔 이미 새로운 연인이 있었고, 냉정하게 변해버린 그녀의 마음만을 확인한 채 쥰세이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이 작업 중이던 치골리의 작품이 처참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쥰세이는 일본으로 향한다. 아오이와의 추억이 가득한 그곳으로..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이 몰랐던 아오이에 대한 비밀과 오해를 풀게 된 쥰세이는 그녀의 행복을 비는 마지막 편지를 아오이에게 전하며 오래전 두 사람의 약속을 떠올린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연인들의 성지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는 그곳에 그녀의 서른 살 생일에 함께 가기로 했던 쥰세이와 아오이는 약속을 지키기도 전에 헤어졌던 것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추억이 작별을 고할 무렵, 조반나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자살 소식에 쥰세이는 피렌체로 오게 되는데..
포털 사이트 영화 소개에 적혀있는 그대로 영화의 배경은 피렌체, 남자 주인공 쥰세이의 직업은 미술품 복원사 그리고 여자 주인공 아오이의 직업은 보석 세공사(사실 영화에서 아오이가 지금 어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보석가게에서 일을 하지만 디자이너로 일을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오히려 현재 남자 친구인 마빈의 여자 친구가 직업인 듯 한 느낌을 받을 정도다). 배경이 이탈리아 피렌체인데 거기다가 남자 주인공은 과거의 예술을 복원하고, 여자 주인공은 밀라노에서 보석을 만지고 있으니 영화 자체에 예술이 듬뿍 담겨있는 느낌이 든다.
스무 살, 대학교 CC로 만나 사랑을 키워왔고, 30살 아오이의 생일날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 가기로 했다. 음악, 미술, 책 그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서로 취향을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나갔던 둘은 의도치 않은 방해로 오해를 하게 되고, 그렇게 이별을 했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과거의 추억이 되었고, 쥰세이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아오이는 밀라노에서 새로운 사랑을 하며 지낸다. 그러다가 친구가 알려준 아오이의 전화번호를 받고 바로 밀라노에 가 아오이를 만나는 쥰세이. 생각보다 잘 지내는 아오이의 모습에 쥰세이는 이상한 감정을 받는다. 본인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힘들어하던 아오이가 잘 지내는 걸 보고 안심을 하면서도 과거를 못 잊는 느낌이랄까? 뭐지 이 남자 주인공? 싶다가 잘생겼으니 봐주기로 하자 싶었다. 사실 여기까지도 '그래 모두에겐 다 저런 시그니처적인 사람이 있지'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곱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부터 난리가 난다.
여기서 나의 영화 삐뚤게 보기는 시작된다.
아니, 서로 못 잊고 지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지내며 동거를 한다. 동거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은 콩밭에 가 있으면 그 마음 따라 콩밭으로 가던가, 아님 집 나간 마음 다시 붙잡고 새 길을 찾아가던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쥰세이와 아오이는 과거에 사는 피렌체처럼 현재에서 과거를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쥰세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매일 노력하는 메미와 아오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마빈이 어느 순간부터 가여웠다. 아오이는 몰라도 대체 왜 쥰세이가 메미를 옆에 계속 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아니 본인이 마음이 없는 게 지금 영화 30분 본 나도 알겠는데, 본인이 모를까? 본인 따라 대학도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메미에 대해 아무런 말 없이 그러던가 말던가의 포지션을 취하다가 나중에 메미가 지쳐서 쥰세이에게 따따따- 퍼부으니 자기가 언제 자기 따라 다 포기하라고 했냐며 오히려 큰소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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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자네. 선을 넘었어.
아니, 매미가 잘했다는 게 절대 아니다. 개인적으로 한 사람을 위한 맹목적인 희생은 100% 본인에게 칼로 돌아온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내게 맹목적인 희생을 한다면 '어허!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게 사람 된 도리, 그리고 비겁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 굳게 믿는다. 그런데 쥰세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로지 본인만을 위한 결정이었던 일본행, 그 일본행에 메미는 당연한 듯 함께 한다. 같이 짐을 싸고, 같이 정리를 한다. 그렇게 한 사람이 맹목적으로 본인만 바라보는데 '나는 너한테 마음이 없어' 그거 말하기 귀찮아서(사실은 필요치 않아서 인 것 같다) 지금까지 무시해왔다가 이제 자기한테 비난의 화살이 가니 '어머어머 내가 언제 그러라고 했니?'라며 한 발 빼기라니.
비겁해 당신. That's NO NO
게다가 일본에 돌아온 후 다시 이탈리아로 가기로 결정한 날 쥰세이는 매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쥰세이는 메미에게 다시 이탈리아로 가는 걸 상의하지 않았고, 매미는 쥰세이 집에 왔다가 모든 쥰세이의 짐이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때 쥰세이가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된다)
다행히도 메미는 그렇게까지 멍청하지 않았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겠다는 쥰세이의 말에, 그게 모두 다 자신의 꿈 때문이라는 거짓말에 메미는 '그거 아니잖아!'라며 소리친다. 그리고 메미는 차마 자존심이 상해 지금까지 내비치지 못했던 본인의 속 마음을 절규하듯 이야기한다.
본인이 질문하면서 이미 자존감은 지하 끝으로 떨어졌을 그 말, '나는 대체 너에게 뭐야?'라는 질문에 쥰세이는 '너에게는 참 고마워하고 있어'라는 이상한 대답을 한다. 그래도 현 여자 친구인데, 사랑한다는 말은 못 할지라도 고마워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말지. 아마 내가 메미였으면 저 대답이 나오는 그 순간, 쥰세이의 뺨을 한 대 크게 치고 뒤 돌아 그냥 걸어 나갈 거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저런 사람에게 내 모든 걸 바쳤다는 걸 한심해하며 나를 크게 질책하고 인생에 저런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살아가겠지.
근데 왜, 그냥 뒤돌아서 갈 거냐고? 쥰세이가 하는 다음 대사를 들을 용기가 없다. 동정도 사과도 필요 없다는 메미의 말에 그리고 왜 나는 안되냐는 절규에 쥰세이는 '나는 아오이를 사랑하니까'라고 말한다.
아- 아- 세상에. 여러분 메미는 오늘 저 자리에서 쥰세이에게 저 말을 듣자마자 죽었습니다.
보람상조 부르세요. 이건 그냥 마음 장례식 치러야 해요.
이쯤 되면 너무나 잔인한 쥰세이는 이미 마음이 다 죽은 메미에게 더 비참한 말을 덧붙인다. '너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는데 안돼' 하, 그동안 둘이 함께 보냈던 시간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아니 메미라는 사람을 인간적으로 인류애를 가지고 생각만 해준다면 저 말까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모든 걸 헌신해 마음을 얻고 싶었던 사람이 나는 사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고, 너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안돼. 미안이라고 말하다니.
이렇게 말할 거였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말해주지. 메미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내가 조금 더 챙겨주면 쥰세이의 마음이 자신을 향할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았는데 참으로 잔인하다. 왜 하필 다 포기하고 간 저 시점에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럴 거면 좀 더 빨리 이야기하지!)
그렇게,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방황하던 쥰세이는 메미에게는 비겁함을 남기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렇게 아오이가 30살이 되는 날 두오모 성당에서 아오이를 만나고, 과거의 이야기를 배경 삼아 지금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메미에게 그 정도로 메몰 차게 하고 갔으면 아오이를 보자마자 달려들어도 시원찮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쥰세이는 냉정하게 아오이를 보고, 아오이가 마빈과 아직도 사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당연스레 한다. 그렇게 뜨거운 하룻밤이 지나고, 쥰세이는 그렇게 아오이를 보내려다가 아오이가 사실은 마빈과 헤어지고 혼자 밀라노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아오이보다 먼저 밀라노에 도착해 아오이와 다시 재회한다.
이 장면을 보며, 그래 괜히 멀쩡하고 착한 사람들한테 상처 주지 말고 과거에 추억 많고, 사랑 많이 하는 너네 둘이 행복하게 살아라 라며 속 시원하게 이 영화의 시그니처격인 장면, 기차 플랫폼 신을 즐겼다. 쥰세이와 아오이에게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건 딱 비겁함과 미련인 것 같다. 쥰세이는 메미에게 비겁했고, 아오이 역시 마빈에게 비겁했다. 아오이 역시 마빈에게 쥰세이와의 과거를 부정하며 나는 너 밖에 없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솔직하지 못했고, 비겁했다. 그리고 쥰세이와 아오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미련했다.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사랑을 계속 붙잡고, 그 과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둘을 보며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건 결국 미련과 비겁함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우리 역시도 얼마나 많은 비겁함과 미련을 가지고 사는지, 나 역시도 쥰세이를 욕하고 아오이를 비난하며 영화를 봤지만, 그 바탕에는 결국 내 모습이 그들에게 보여서 더 그랬을 테다.
이 영화의 명대사라고 하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쥰세이와 아오이의 명대사를 떠올리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쥰세이의 스승이었던 조반나 선생의 말이 가장 가슴에 박혔다.
넌 질투 따위엔 지지 마렴, 네겐 미래가 있으니까
참 좋은 말이네, 근데 누굴 겨냥하고 하는 말이지? 싶었는데 영화의 끝에서 알게 되었다. 결국 세상 잘 난 것 같은 조반나 역시 사람이었고, 그녀가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미련하게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 대사가 다시 가슴에 콕- 박혔다.
처음에 봤을 땐 둘의 사랑이야기에 집중하며 '세상에 너무 로맨틱하다'라고 끝났던 영화인데, 다시 보니 또 다른 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고 이 영화를 본다면 캐릭터들의 다른 면들이 보이기 시작하겠지? 아 - 이게 세월을 보내는 재미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