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민수씨는 관악산에서 있었던 일을 곧 잊어버렸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 회사에서 종종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번은 일을 하다가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잠시 열어두었다.
시원한 공기가 사무실로 확 밀려 들어왔는데 민수씨는 크게 호흡을 하며 신선한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그때 관악산 정상에서 느꼈던 것처럼 귓속에서 뭔가 시원한 액체가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났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때 민수씨 귀에서 ‘삐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 조정을 하다가 주파수가 맞았을 때의 느낌 같았다.
민수씨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오진수차장이 고팀장과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둘 다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때 민수씨 귀에서 ‘삐삑’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리고 오차장과 고팀장이 하는 대화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빈 채로 연습을 해야 된다니까요. 그래야 실력이 늘어요.”
오차장이 얘기했다.
“해 봤는데 잘 안돼. 채를 잡고도 안되는데. 어떻게 빈 채로 연습을 해.”
고팀장이 얘기했다.
오차장은 골프를 잘 쳤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는 오프로로 통했다. 최근 고팀장이 골프를 시작해서 한참 재미를 붙이고 있었는데 연습 방법에 대해 오차장이 고팀장에게 조언해 주고 있었다. 김민수씨는 그들이 너무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어서 업무 얘기를 하는 줄 알았다.
잠시 대화를 듣다보니 재미있었다. 고팀장은 골프를 잘 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고 오차장은 성심성의껏 조언을 해 주다가 살짝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그래도 오차장은 화를 내지 않고 끝까지 설명해 주고 있었다. 역시 오차장은 사람이 좋다고 생각했다.
민수씨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 뒤로 휴게실이 있었다. ‘삐삑’ 민수씨 귀에서 또 소리가 났다. 휴게실은 벽으로 가려져 누가 있는 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비밀 얘기를 하는 지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조용 얘기하고 있었다.
“정수지부장이 이번에 만난다는 사람 얘기 들었어?”
“아니. 야구선수 만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야구선수는 진작 헤어졌지. 사귄 기간도 두달밖에 안 된대.”
“아. 그래? 둘이 잘 어울리던데. 아깝네.”
“뭐가 아깝냐? 우리 정부장님이 훨씬 아깝지.”
“하긴. 정부장님은 누굴 만나도 아깝긴 하지. 너무 인물이 좋아도 안 좋은 것 같애.”
“왜??”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하니까.”
“하긴 그렇긴 하지. 근데 이번에는 누구 만난다는 거야?”
“아. 이번에 만나는 사람은 경찰이래. 그냥 평범한 경찰.”
“엥? 경찰? 정수지부장이?? 너무 안 어울리는 거 같은데.”
“들어보니까 이번에는 결혼까지 할 거 같더라. 근데 더 대박인 건 그 남자 키가 160 정도되고 평.범.하다는 거지.”
“대박. 정부장님이랑 너무 안 어울리는데? 집이 부잔가 보지?”
“아니. 집도 찢어지게 가난하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빚을 많이 남겨서 아직도 빚을 갚고 있다더라고.”
“헐…”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직원 3명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 회계부의 정수지부장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정부장은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는 4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외모는 3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큰 키에 도회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정부장은 젊은 시절 수 많은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다.
퇴직한 한 임원은 당시 정부장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는데 정부장이 냉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정부장은 강남의 유명한 치과의사와 결혼했는데 2년이 채 안되어 이혼을 했다. 그 후 그녀는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는데 만나는 상대가 화려했다.
일반 회사원은 쉽게 만나기 어려운 재계의 인사들이나 법조계 사람, 톱모델, 심지어 한참 연하의 야구선수와도 연애를 했다. 정부장은 외모도 뛰어났지만 업무 능력은 그 이상이라 그녀의 화려한 싱글라이프에 대해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단지 부러움의 대상이라 정부장의 연애 스토리는 항상 회사 사람들의 단골 이야기 거리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번에도 정부장은 연애상대가 바뀐 것 같았다. 민수씨는 정부장을 떠올렸다. 아나운서 같이 또렷한 얼굴에 짧은 치마, 스마트함과 도도함이 그녀의 트렌드 마크였다.
그런 그녀가 평범한 남자를 만나고 있다니. 민수씨는 상상이 안 됐다. 하지만 남녀관계라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니까.
김민수씨는 개인적으로 정수지부장과 친분이 있었다. 그가 신입사원이었을 때 거래처와 장려금 수금 이슈가 있어 한 동안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계약을 한 거래처 담당자는 퇴사를 한 상태였고 민수씨는 신입사원이라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 지 몰라 난감했다.
팀 선배들도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라 민수씨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혼자서 일주일 가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에는 그가 내부 징계를 받고 퇴사처리까지 될 수 있었다.
그때 정부장이 민수씨를 도와줬다. 오래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면서 몇 년전 자료부터 꼼꼼하게 체크를 했다. 그리고 틀어진 부분을 확인해서 민수씨에게 알려줬다. 덕분에 그는 정상적으로 장려금을 수금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정부장을 어렵게 생각했다. 완벽한 외모에 빈틈없는 일처리, 그리고 까칠한 성격. 민수씨도 처음에는 정부장을 어렵게 생각해서 도와달라고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민수씨의 그런 상황을 알고 먼저 나서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시 과장이었던 정부장은 원래 까칠한 성격이 아니었다. 숫자와 관련된 업무를 하다 보니 정확하게 일 처리를 해야했고 사람들에게 원칙을 얘기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맺고 끊는 게 정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부장 성격이 까칠할 것이라 생각했고 어려워 했던 것이다.
그녀를 잘 아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녀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다. 민수씨도 그 중 한명이었다. 당시 며칠 동안 같이 야근을 하며 민수씨는 그녀와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정과장과 꽤 친해질 수 있었다.
그 후 가끔씩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편안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도저히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친하다는 것을 회사 사람들은 잘 몰랐다. 민수씨는 회사 일을 하다가 고민이 있을 때 정부장에게 얘기했고 정부장도 속 얘기를 민수씨에게 털어놨다.
그에게는 은인이자 든든한 고민 상담자인 정수지부장. 그녀가 그 평범한 남자와 잘 되기를 마음속으로 바랬다.
김민수씨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에 점점 익숙해 졌다.
처음에는 우연치 않게 한번씩 들렸지만 나중에는 타겟을 정해서 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심호흡을 몇번 하다보면 귀에서 무언가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듣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면 ‘삐삑’ 하는 소리가 나며 주파수가 맞춰졌고 그때부터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남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듣다 보니 계속 듣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회사는 잘 돌아가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고 있었다. 가정이 있는 유부남, 유부녀가 만나고 있는 경우도 꽤 있는 것 같았고 점잖아 보이는 사람이 유흥업소에 갔다가 와이프에게 걸려 이혼 소송을 당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옆 팀의 모 과장은 최근 바람을 피웠다가 와이프에게 걸렸는데 와이프도 똑같이 바람을 피웠다는 얘기도 들었다. 주식을 샀는데 얼마나 수익이 났다는 얘기, 대출 끼고 아파트를 샀는데 몇 달만에 얼마나 올랐다는 얘기, 중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어디 학원에 들어갔는데 누구 선생님이 잘 가르친다는 얘기 등등.
민수씨는 원치 않게 회사에 떠 도는 많은 소문과 일상적인 얘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재미있었지만 듣다보니 괜히 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많았다.
회사에서는 똑같이 잘 차려진 정장을 입고 근무를 한다. 깔끔하게 다려진 옷 안에는 온갖 형태의 인간 군상이 들어가 있다. 보이기를 원치 않는 그런 모습은 옷이라는 가면으로 가려진다.
이혼소송을 하고 있다는 구매 부서의 오과장의 사연을 들었다. 지나가다가 한번씩 얼굴을 마주쳤는데 상당히 지쳐보였다. 업무 때문에 오과장과는 자주 얘기를 해야했는데 그 상황을 알고 나니 만날 때마다 불편했다. 차라리 그런 걸 모르고 있었다면 괜찮았을텐데 싶었다.
문득 민수씨는 어릴 적 소라게를 키울 때 생각이 났다. 소라게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한번씩 소라껍질을 큰 것으로 바꿔줘야 하는데 주위에 좀 더 큰 소라껍질을 놔두면 새벽에 소라게가 자기 집에서 빠져 나와 큰 소라껍질로 이동을 한다.
민수씨는 소라껍질에서 나오는 소라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항상 껍질을 쓰고 있어 그 뒷모습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밤에 자는 척을 하다가 소라게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났을 때 얼른 일어나서 불을 켜고 소라게가 움직이는 모습을 봤다.
자기 집에서 나와 큰 소라껍질로 이동하던 소라게는 당황해서 중간에 그대로 멈춰섰다.
그리고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민수씨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껍질이 없는 소라게의 모습은 상당히 이상했다. 앞모습은 정상적이었는데 뒷모습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흉찍한 모습이었다.
소라게는 시무룩하게 다시 자기집으로 돌아가서 나오지 않았다.
며칠 후 소라게는 조용히 죽어있었다. 아마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죽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수씨도 한동안 그 생각을 하며 죄책감이 들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누군가의 치부를 들었을 때 마다 민수씨는 소라게 생각이 났다. 차라리 안 들었으면, 몰랐으면 좋았을텐데.